러시아 루블 강세가 ‘환상’인 이유

입력 2022-06-23 17:20 수정 2022-06-23 17:33

루블 가치 7년래 최고치…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경상수지 흑자
서방 제재로 해외 수입 쪼그라들어
실업자 늘고 빈곤율 치솟아

▲러시아 모스크바 환전소 스크린 앞을 한 남성이 지나가고 있다. 모스크바/EPA연합뉴스
▲러시아 모스크바 환전소 스크린 앞을 한 남성이 지나가고 있다. 모스크바/EPA연합뉴스
미국 달러 대비 러시아 루블 가치가 7년래 최고치로 치솟았다. 루블 가치는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 제재로 폭락했다. 이후 슬금슬금 오르더니 약 석 달 만에 7년래 최고치 기록을 갈아치운 것이다. 루블 강세를 두고 서방 제재의 ‘약발’이 먹히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22일(현지시간) CNBC방송에 따르면 이날 달러·루블 환율은 전일 대비 1.3% 오른 달러당 52.3루블까지 떨어졌다. 루블 가치는 2015년 5월 이후 7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았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 제재로 3월 초 달러당 139루블까지 추락했던 루블화 가치는 약 석 달 만에 대폭 뛰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루블 강세를 서방 공격의 도구로 활용했다. 그는 지난주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경제포럼(SPIEF)에서 “러시아 경제는 파탄나지 않았다”며 “(서방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역공을 펼쳤다.

서방의 강력한 제재에도 루블이 강세를 보이는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에너지 가격 급등에 따른 기록적인 수익 잔치 영향이다. 러시아는 세계 최대 가스 수출국이자 2위 원유 수출국이다. 유럽은 대러 제재에도 매주 수십 억 달러 규모의 러시아산 에너지를 구입했다. 원유 가격이 큰 폭 뛴 것도 러시아의 배를 불렸다. 국제유가 벤치마크인 브렌트유 가격은 작년 이맘때보다 60%가량 비싸다. 그 결과 대러 제재 조치에도 유럽이 우크라이나에 원조로 보낸 자금보다 러시아에 원유, 가스, 석탄 수입 대금으로 지불한 돈이 더 많았다.

2월 24일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100일간 러시아는 화석연료 수출로 980억 달러(약 128조 원)를 긁어모았다.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인 600억 달러가 유럽에서 들어왔다.

유럽은 대러 에너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지만 수년이 걸릴 전망이다.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2020년 유럽 가스 수입의 41%, 원유의 36%가 러시아산이었다.

미국 싱크탱크 외교정책연구소(FPRI)의 막시밀리안 헤스 선임 연구원은 “러시아가 서방에 에너지를 덜 팔고 있지만 최고가로 판매하고 있어 기록적인 경상수지 흑자를 올리고 있다”며 “이게 루블 강세의 배경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러시아 중앙은행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러시아의 경상수지 흑자는 11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지난해 같은 기간의 3.5배가 넘는 수준이다.

러시아 정부의 자본통제도 루블을 떠받쳤다. 러시아는 서방의 제재가 시작되자마자 엄격한 자본통제를 시작했다. 루블 가치가 폭락하자 러시아는 기준금리를 9.5%에서 20%까지 대폭 올렸다. 자본 유출을 막으면서 루블 가치 하락을 방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서방 제재로 해외 수입이 쪼그라든 점도 루블 강세를 견인했다. 서방사회는 러시아 기업과 은행들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퇴출시켰다. 러시아는 달러로 결제를 할 수 없게 되면서 엄청나게 쌓아둔 외환보유고를 써먹지 못하게 됐다. 반강제적으로 지출이 줄어든 것이다.

헤스 연구원은 “루블 강세는 수입이 대폭 줄어든 결과”라면서 “경제에 필요한 물품을 해외에서 사야 되는데 러시아는 그걸 못했다”고 지적했다.

루블이 강세를 보이고 있지만 이게 러시아 경제의 강한 펀더멘털에 기반한 것이 아닌 국제수지 흑자, 원자재 가격 상승, 정부 조치 등 외부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는 평가다.

전쟁 이후 수천 곳의 글로벌 기업들이 러시아를 떠났다. 해외투자도 타격을 입었다. 5월 중순 러시아 재무부는 올해 실업률이 7%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러시아 통계청은 올 1분기 생활고에 놓인 러시아인이 1200만 명에서 2100만 명으로 급증했다고 밝혔다.

루블이 더 이상 러시아 경제의 건전성을 대변하는 지표가 아닌 셈이다. 헤스는 “러시아 경제의 속살을 제대로 봐야한다”며 “루블 가치가 높아보여도 경제와 삶의 질은 황폐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재 루블 강세가 ‘포템킨 환율’이라는 비아냥이 나오는 이유다. 포템킨 마을은 러시아 예카테리나 2세에게 번영의 '환상'을 심어주기 위해 건설된 가짜 마을을 말한다. 러시아 사람들이 실업의 나락에 빠져 빈곤에 내몰리고 있지만 루블은 홀로 강세다. 결국 ‘빛 좋은 개살구’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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