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각] 술, 혹은 유리 감옥에 갇힌 영혼

입력 2020-07-29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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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학 저술가

나이가 들면서 술을 입에 대지 않는다. 술과의 밀회는 끝장났다. 술은 냉담한 애인처럼 내게서 멀어졌다. 술 마시는 일이 예전처럼 즐겁지 않을뿐더러 주변에서 술 마실 벗을 찾기도 어렵다. 이 사태의 원인을 술이 일으키는 마술적인 도취와 약동을 내 몸이 더는 견디기 힘든 탓에서 찾을 수도 있으리라. 어쩌면 이는 노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슬픈 일이다. 내 기억에 떠오르는 대로 적자면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 포크너, 레이먼드 카버, 존 치버, 찰스 부코스키 같은 전설적인 술꾼 작가들에게 술은 문학적 상상력을 지피는 연료였다. 우리 문학사에도 변영로에서 시작해 염상섭, 김관식, 천상병, 김종삼, 조태일, 박정만 등을 거쳐 김정환, 김영승에 이르기까지 전설적 술꾼들은 아주 많다. 술은 이들에게 생기와 활력을 북돋우고 몽환적 상상력을 고양시키는 묘약이었다. 만일 술이 없었다면 그들이 남긴 문학 유산 중 상당 부분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맨정신으로 쓴 소설들은 시시해”라고 말했다.

또래들보다 늦게 술을 배운 편이다. 나는 늦음을 벌충이나 하려는 듯 30대에 많은 양의 술을 마셨다. 한때나마 술에 기대어 짐승 같이 잔뜩 웅크린 채 지냈다. 생활은 삭막하고, 가난하고 외로운 마음은 자주 바닥을 드러냈다. 맨정신으로 견디기 힘들었다. 그때마다 취기로 도피하여 그 삭막함과 고갈이 만드는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을 쳤다. 얼이 반쯤 나간 채 술이 불러온 몽롱함 속에서 우울과 황홀 사이에서 비틀거렸다. 알코올이 혈관에 스며 취기로 고양되던 젊음, 오만, 신명을 온전하게 누렸다. 연애의 기쁨과 실연의 낙담도 늘 술과 함께했다. 충분히 젊었던 그 시절 술은 우정의 촉매제고, 당겨진 활시위만큼이나 기쁨을 고양시키는 묘약이었다. 술은 입으로만 마시지 않고, 눈으로도 들이켰다. 어느 순간 창백한 하늘을 가르고 자취를 감추는 번개같이 내 젊은 날들은 사라졌다.

그게 다는 아니다. 30대에 술을 많이 마신 것은 출판사를 꾸리며 여러 사람을 만나야 했던 탓이다. 아니, 내 젊음이 음주에 따르는 숙취의 후유증이나 간 피로 같은 과부하를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숙취로 고생한 적은 있었으나 술에 완전히 곯아 떨어져 ‘블랙아웃’이 된 채 전날 기억이 사라져 괴로워한 적은 없었다. 나는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까지 간 알코올중독자는 아니었다. 그러니 술에 잠식된 영혼을 구출하려고 몸부림친 적은 없다. 출판사를 그만두고 자발적 유배를 택해서 시골로 내려간 뒤 조촐한 생활을 꾸리는 동안 내 사교생활은 단순해지고, 그에 따라 술자리의 소동과 활기에서도 멀어졌다. 아무도 찾지 않는 시골 생활의 적적함을 술로 달랜 적이 없지 않지만, 마흔 살 이후 음주 기회는 줄고 주량도 줄었다. 그렇다고 술이 만든 후광이 사라진 뒤 한층 단조롭고 지루해진 삶에 낙담하거나 괴로워하지는 않았다. 분명해진 건 내가 애주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시골 벽지에서 벌거벗은 마음으로 맞닥뜨린 중년의 삶은 고독했다. 새벽엔 물안개가 올라오고, 밤에는 산에서 내려온 오소리가 집 근처로 왔다가 소리없이 돌아가는 기척에 귀를 세우곤 했다. 시골집과 마주한 앞산과 큰 저수지의 물빛이 저녁 이내 속에 잠길 때 눈과 진창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건너온 지난 삶의 격랑들을, 젊음과 비루함을, 비겁과 실수들을 되돌아보는 동안 치열해졌다. 치열해진 건 삶에의 의지가 아니라 내 안의 고독이다. 그동안 세상에 내놓은 내 문학의 생산이 보잘것없다는 게 자명해졌다. 나는 부끄러움 때문에 숨고 싶어졌다. 모란과 작약의 아름다움에 눈뜬 것은 그 무렵이다. 시골에 사는 동안 나는 와인을 마시는 기쁨을 새로 알게 되었다. 열매 없이 꽃을 피우고 덧없이 지는 식물에게서 내 죄를 대속(代贖)하는 황홀을 발견하고, 와인을 마시면서 희망의 빛줄기가 뻗쳐오는 듯 기뻤다. 봄과 가을마다 한 날을 정해 시골에 와서 새로 사귄 시골의 벗들을 불러 와인을 함께 나누며 저녁 한때를 보내곤 했다. 세월이 더 흘러 와인마저도 더는 마시지 않게 되었다.

보들레르는 술꾼은 아니었지만 ‘취하는’ 것에 관심이 많은 댄디였다. 댄디는 이 세계에 불시착한 자들, 현실과 불화하는 자들이다. 그는 댄디즘에 대해 이렇게 썼다. “댄디즘은 데카당스 시대의 영웅주의가 최후로 분출한 것이다. 댄디즘은 지는 태양이다. 댄디즘은 쇠하는 별처럼, 찬란하나 열기가 없고 멜랑콜리로 가득하다.” 보들레르는 무위(無爲)의 낙오자라는 점에서, 그리고 미와 사치를 좇으며 멋 부리기에 여념이 없는 정신의 귀족 계급, 숭고한 이상에 자기를 봉헌할 준비가 된 자라는 점에서 댄디가 분명했다. 금치산자 선고를 받고 그 저주에서 풀려나기 위해 몸부림을 친 그가 쓴 시와 산문은 그 고투의 흔적을 드러낸다. 그의 비명 같은 외침, “이 세계 바깥이라면 어디로든!”, 이 외침은 위선과 뻔뻔한 악으로 가득 찬 이 세계에서 산다는 것의 끔찍함을 암시한다. 시인은 이 세계에서 달아나는 시도를 한다. 물론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이 넝마 같은 세계에서 달아나기, 그중 하나가 ‘인공낙원’을 짓는 일이다. 해시시나 알코올의 힘을 빌려 향락에 빠지는 것! 보들레르의 시 ‘포도주의 혼’은 도취와 망각으로 이끄는 술이 하나의 도피처임을 노래한다.

“어느 밤, 포도주의 혼이 병 속에서 노래한다./사람아, 오 불우한 자여, 유리의 감옥 속에,/진홍의 밀랍 속에 갇혀서, 내 그대 향해/목청 높여 부르노라, 빛과 우정이 넘치는 노래를!//나는 알고 있나니, 내게 생명을 주고 영혼을 주려면,/저 불타는 언덕배기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땀과 찌는 듯한 태양이 있어야 하는가를,/그러나 나는 헛되거나 해롭지 않으리,//노동에 지친 한 사내의 목구멍 속으로/떨어져 내릴 때면 내 기쁨 한량없기에/그의 뜨거운 가슴속은 정다운 무덤이 되어/내 싸늘한 지하실보다 한결 아늑하기에.//그대 들리는가 주일날 저 우렁찬 후렴들이/내 설레는 가슴속에서 희망이 수런대는 소리가?/두 팔꿈치 탁자 위에 고이고 소매를 걷어붙여라,/그리고 나를 찬양하라 그러면 마음 흐뭇하리라.//나는 기뻐하는 그대 아내의 눈동자 빛나게 하고,/그대 아들에게는 힘과 혈색을 돌려주고/인생의 그 가녀린 투사를 위하여 나는 투사의/근육을 다져주는 기름이 되리라.//내 그대 가슴속으로 떨어져, 신들의 양식으로서,/영원한 파종자가 뿌린 진귀한 씨앗이 되리라,/우리의 사랑에서 시가 태어나/진귀한 꽃처럼 신을 향해 피어오르도록!”(샤를 보들레르, ‘포도주의 혼’)

보들레르에게 포도주는 단순한 주류(酒類)가 아니었다. 술은 괴로움에서 도피하여 황홀경에 드는 해시시 같은 마약의 일종이다. 보들레르는 술의 생리학을 꿰뚫어보고, “술은 하찮은 ‘인류’를 통하여/눈부신 팍토르스 강, 황금의 강이 되어 흐르네/술은 인간의 목구멍을 통해 제 공훈을 노래하고/여러 혜택 베풀며 진짜 임금처럼 군림하네”라고 썼다. 술자리는 왁자지껄 소란한 가운데 장엄한 마술처럼 펼쳐지는 축제와 같다. 보들레르는 “포도주의 혼이 병 속에서 노래한다”고 첫줄에 쓴다. 그렇게 포도주의 혼에 빙의되어서 부른 사랑의 시와 우정의 노래가 시작된다. 포도주는 “유리 감옥”과 “진홍의 밀랍”에 갇힌 영혼인데, 이것은 생명을 주고, 영혼을 고양시키는 것! 포도주는 쓸쓸한 자들의 혼을 만취에 밀어 넣고 피안의 기슭을 헤매게 한다. 이 “신들의 양식”을 들이킨 자들은 “희망이 수런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금빛 기쁨에 취해 우정의 노래를 부르리라. 나는 비록 술에서 멀어졌지만 젊은 날 그 황홀하던 술자리와, 술에 취해 목청을 높여 부르던 “빛과 우정이 넘치는 노래”를, 그 순간 가슴에 벅차오르던 덧없는 삶의 공훈(功勳)마저 잊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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