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탈하고 따뜻한 마음 가졌던 인간 구자경

입력 2019-12-14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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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아파도 약속 지키고, 허례허식 경계… 문중에서 편하게 부를 수 있게 상남(上南) 아호 지어

▲진주중학교 시절의 상남 구자경 명예회장 (사진제공=LG그룹)
▲진주중학교 시절의 상남 구자경 명예회장 (사진제공=LG그룹)
고 구자경 명예회장은 유가(儒家)의 엄격한 가풍 속에서도 실사구시를 중시하며 번성해 온 능성 구씨 집안의 후손이다. 1925년 경남 진양군(현 진주시)에서 LG 창업주인 연암 구인회 회장 슬하의 6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형제간의 우애와 근검한 생활을 중요시하는 가통 속에서, 특히 장남으로서 집안의 중심 역할이 가져야 할 ‘책임감’과 흐트러짐 없이 가족의 모범이 돼야 할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이렇게 구 명예회장에게 자리 잡은 가치관은 경영 활동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경영자로서 자신에게 엄격함을 유지하는 한편, 항상 리더의 역할과 책임의식을 먼저 생각하게 했다.

실제 구 명예회장은 회장으로 취임한 뒤에도 외부 업무를 마친 후 단 10분이 남아도 꼭 회사로 돌아온 후 퇴근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이를 거의 어기지 않았다.

또 몸이 좋지 않을 때조차도 상대방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일정을 바꾸지 않을 정도로 신뢰를 중요시했다. 또 지방 공장을 방문하거나 외국 출장을 갈 때도 불필요한 의전 절차를 삼가도록 했는데, 이는 회장이 먼저 모범을 보여 허례허식을 경계하는 생각에서였다.

구 명예회장은 당시 서부 경남의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이었던 진주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나게 됐다. 중학교 시절에는 씨름과 같은 운동과 서예 등을 열심히 했다고 한다.

구 명예회장의 유년 시절 장래 희망은 교사였다. 지수초등학교를 다닐 때 과학을 접목한 농경법을 가르친 선생님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자연 친화적인 삶이 중요하다는 것과 교사의 길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후에 진주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희망’을 주제로 한 작문 시험에서도 주저 없이 교사로서의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1944년 진주사범학교 강습과에 입학 후 1년 과정을 마치고 곧바로 진주의 한 소학교로 발령받았다.

헌데 그 소학교의 일본인 교장은 일본에 기증할 경전투기 구입 건으로 구 명예회장의 부친이자 당시 구인상회를 운영하던 구인회 사장에게 기부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어 구 사장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학교에 출근해보니 부임 인사를 받는 교장과 일본인 교사들의 표정이 모두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자리도 구석으로 배정받게 됐다. 구 명예회장은 이런 차가운 분위기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느니 차라리 고향에서 농사를 짓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고 다음날부터 출근을 포기하고 말았다.

귀향해 한 동안 감나무와 복숭아나무를 가꾸고 있던 차에 마침 모교였던 지수초등학교 교사로 다시 발령받아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퇴근 후에는 농사일에 몰두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구 명예회장은 지수초등학교에서 2년,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에서 3년을 교직에 몸담았는데, 무엇보다 학교 규율을 세우는 것을 우선시하여 ‘호랑이 선생님’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제자였던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은 당시 모습을 회상하며 “체육시간에 호루라기를 불며 구령을 붙이는데 그 모습이 하도 엄해 우리는 벌벌 떨었지요. 정말 호랑이 선생님이 오셨구나 하면서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미래에는 기술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시대가 틀림없이 올 것이라 믿고, 교육의 중점목표에 기술력 양성을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시로 학생들에게 “나라가 힘이 강해지려면 기술이 발전해야 한다. 그러니 훌륭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며 기술의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곤 했다.

구자경 명예회장의 가치관과 경험은 장남인 고 구본무 회장이 2018년 5월 20일 숙환으로 별세할 때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고 구본무 회장은 회장 취임 전까지 20여년간 실무경험을 쌓았는데, 이는 구자경 명예회장이 본인 스스로도 회장직에 오를 때까지 20년간 현장에서 경영인으로 혹독한 훈련을 받은 데다, 평소 “아무리 가족이라도 실무경험을 쌓아서 능력과 자질을 키우지 않는다면 승진도 할 수 없고 중책도 맡기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당시 기업의 회장직 승계자는 임원급으로 회사에 발을 디뎌 경영수업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고 구본무 회장은 회사의 가장 기초조직인 과장 책임자부터 단계적으로 실무를 수행함으로써 다양한 경영실무와 경영자적 리더십 및 안목을 쌓아갔다.

구 명예회장의 여러 가르침과 교훈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것 중 하나는 경영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과 생활자세였다. 1995년 회장직 승계 당시 구 명예회장은 고 구본무 회장에게 “경영혁신은 끝이 없다. 자율경영의 기반 위에서 경영혁신은 계속 추진해야 한다. 그룹 구성원 전체의 공감대를 형성시켜 합의에 의해 일을 추진하라. 권위주의를 멀리 하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떤 이유에서든 약속을 지키고 사치를 금해야 한다는 구 명예회장의 철칙도 고 구본무 회장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구 명예회장은 평소 비록 푼돈일지라도 사치나 허세를 위해 낭비하는 것을 큰 잘못으로 여기고 항상 ‘근검절약’을 생활신조로 삼으면서 이를 실천할 것을 강조해왔다.

구 명예회장이 스스로 ‘상남(上南)’이라는 아호를 지은 연유는 문중에서 항렬이 낮지만 나이가 많은 그의 호칭을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상남’은 고향집 앞에 증조부인 만회 구연호 공이 놓은 작은 다리인 ‘상남교’에서 따온 것으로, 어린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도랑을 치고 호롱불을 밝혀 붕어나 미꾸라지를 잡던 추억이 깃든 곳이었다.

▲버섯농장 한 켠에 마련된 조립식 건물 내의 작은 사무실. 구자경 명예회장은 이 정도면 버섯농장을 운영하는 농사꾼에겐 과분한 공간이 아니냐고 말했다. (사진제공=LG그룹)
▲버섯농장 한 켠에 마련된 조립식 건물 내의 작은 사무실. 구자경 명예회장은 이 정도면 버섯농장을 운영하는 농사꾼에겐 과분한 공간이 아니냐고 말했다. (사진제공=LG그룹)
구 명예회장이 은퇴 후 머물렀던 연암대학교의 농장 내 사무실도 대기업 그룹의 명예회장이 사용하는 공간이라기보다는 공사장이나 작은 상가의 사무실로 여겨질 만큼 수수하고 소박한 공간이었다.

구 명예회장은 25년간 국내 재계를 대표하는 대기업 회장이었지만, 은퇴 후 일체의 허례와 허식 없이 간소한 삶을 즐기며 그야말로 ‘자연인’으로서 여생을 보냈다.

LG 관계자는 "은퇴 후에도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세는 기술개발에 매진했던 경영인의 모습 그대로였고, 자연인으로서 제2의 인생 은퇴한 경영자의 모범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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