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지금] 드라기 총재가 드라큘라가 된 이유

입력 2019-10-3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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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억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팟캐스팅 안쌤의유로톡 운영자

독일에서 최대 부수를 자랑하는 타블로이드 일간지 빌트 1면에 지난달 13일 괴물이 등장했다. 보기에도 흉측한 송곳니 두 개를 드러낸 드라큘라다. 그런데 찬찬히 뜯어보니 유럽중앙은행(ECB) 마리오 드라기 총재가 드라큘라로 묘사됐다.

‘드라기의 제로 금리가 저축한 사람의 돈을 다 빨아 먹는다. 신용이라는 마약을 시중에 넘치도록 공급한다.’

위와 같은 아주 자극적인 제목으로 드라기 총재를 부지런한 독일인의 피를 빨아먹는 드라큘라로 맹비난했다. 전날 ECB는 통화정책회의에서 시중에 돈을 푸는 양적완화 정책(순자산 매입 프로그램)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2018년 1.9%로 비교적 괜찮았던 단일화폐 유로존의 경제성장률이 올해 들어 성장세가 계속해 떨어졌다. 유로존 경제의 27% 정도를 차지하는 독일 경제가 미중 무역전쟁의 와중에 직격탄을 맞았다. 여기에 미국과 유럽연합(EU)과의 무역분쟁, 영국의 EU 탈퇴, 브렉시트 협상의 불확실성으로 경기 전망도 어둡다. 내일 퇴임하는 드라기는 퇴임 전 중앙은행이 할 수 있는 금리 추가 인하와 순자산 매입 프로그램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시중은행이 ECB에 자금을 예치할 때 적용되는 예금 금리를 -0.4%에서 -0.5%로 더 내렸고 다음 달 1일부터 월 200억 유로 규모의 국채나 회사채와 같은 금융 자산을 매입한다.

독일 언론재벌 악셀 슈프링거가 발간하는 빌트는 하루에 158만 부를 찍어내며 독일 내 보수파를 대변한다. 이를 신호탄으로 독일 정치인들이 맞장구를 쳤다. 2010년 유로존 위기 때 재무장관으로 그리스와 아일랜드 등 경제위기를 겪은 국가들에 대해 긴축 일변도 정책을 관철한 볼프강 쇼이블레(현 독일 연방의회 의장)는 “드라기 총재의 초저금리 정책이 극우 포퓰리스트 세력의 대두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드라기 총재가 독일의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인 독일대안당(AfD) 부상의 일등공신으로 둔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근거가 없다. 경제위기 대응에 무기력한 정부에 대규모 난민 신청자들이 몰려들었고 이를 포퓰리스트 정당이 교묘하게 활용하면서 독일과 스페인, 이탈리아 등에서 극우정당이 세력을 확장해왔다. 더구나 독일 정부는 초저금리 혜택을 톡톡히 봤다. 독일의 국채금리가 마이너스로 떨어지기도 해 자금조달 비용에서 3680억 유로, 국내총생산(GDP)의 11% 정도 이익을 얻었다는 게 연구소들의 추정이다.

따라서 독일의 ECB 흔들기는 말이 안 된다. 독일 마르크화는 유럽 경제에서 미 달러에 버금가는 기축통화로 기능했다. 독일 경제가 EU의 21% 정도를 차지하기에, 1999년 1월 유로가 출범하기 전 EU 회원국들은 주로 마르크화로 거래하고 이를 외환보유액으로도 비축했다. 독일은 마르크화를 포기하는 대가로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물가안정을 우선하는 정책을 ECB에 그대로 이식했다. 지난달 말 물가상승률은 1.2% 정도로 목표치인 2% 내외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이처럼 ECB는 물가안정이라는 중앙은행의 업무를 잘 수행 중이다. 여기에다 유럽중앙은행은 글로벌 경제위기의 와중에 구원투수로 나서 위기 극복에 일등공신이 됐다.

2003년부터 8년간 ECB 총재였던 장-클로드 트리셰는 그리스와 아일랜드, 포르투갈 등 경제적 기반이 약한 회원국을 염두에 두고 국채 매입을 시행했다. 2011년 11월 유로존 위기가 최악이었을 때 바통을 이어 받은 드라기는 이런 프로그램을 대폭 확대했다. ECB는 2015년 3월 자산 매입 프로그램을 시작해 지난해 말 종료했는데 시중에 무려 2조6000억 유로를 풀어 경기를 부양했다. 2차 세계대전 후 최악의 경제위기에서 중앙은행이 이처럼 과감한 정책을 시행해 위기 극복에 기여해왔다. 이 때문에 슈퍼 ‘마리오’가 된 드라기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회원국에 확장재정 정책을 간곡하게 당부했다.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와의 퇴임 전 인터뷰에서도 중앙은행이 쓸 수 있는 정책 도구를 거의 다 사용했기에 재정 여력이 있는 회원국이 경기부양에 나서야 한다고 독일을 거명하지 않은 채 재차 촉구했다.

하지만 주머니가 두둑한 독일은 모르쇠로 일관해왔다. 독일은 사실상 균형재정을 법에 명시했고 유로존 회원국에도 이를 채택하도록 했다. 독일은 지난해 GDP의 7.25% 정도인 2460억 유로의 경상수지 흑자를 달성했다. GDP 대비 중국보다 흑자 비율이 더 높다. 그런데 균형재정 때문에 넘치는 돈을 쓰지 못하고 쓰려 하지 않는다. 독일은 유럽통합과 유로존을 이끄는 지도자이다. 지도자는 돈이나 무력, 매력 등을 적절하게 결합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그런데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으면서 일 잘하는 유럽중앙은행을 근거 없이 비판하는 것은 못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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