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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디뜨거운 대통령 선거였습니다.
4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제21대 대선은 전체 유권자 4439만여 명 가운데 79.4%인 3524만여 명이 투표에 참여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이는 1997년 15대
며칠 전 강원도 봉평에 글을 쓰는 사람 십여 명과 함께 일박이일 여행을 다녀왔다. 금요일 오후에 모여 토요일 점심 때 끝나는 여행 일정 속에 시인 한 명 소설가 한 명, 이렇게 두 시간씩의 작가와의 대화 시간을 가졌다. 다시 분임토의처럼 자기 글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며 밤늦게까지 술잔을 나누었다.
다음날 아침 식사를 끝내기 무섭게 태기산 정상으로 나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7일 “세상이 그렇듯이, 재난도 약자를 먼저 공격한다”며 “재난의 고통은 약자에게 더 가혹하다. 바이러스는 사람을 가리지 않지만, 그 고통은 평등하지 않다”고 제2차 긴급재난지원금의 ‘선별 지급’ 필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이 대표는 이날 국회 본회의에서 열린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고용취약계층, 소득취약계층은 생계가
설탕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완전하게 갈리는 기호품 중에 커피가 있다. 커피는 달게 먹는 사람과 조금 달게 먹는 사람, 그리고 설탕을 아예 안 넣고 쓰게 먹는 사람으로 나뉜다. 나 역시 어릴 때는 단것을 좋아했는데, 어른이 된 다음엔 단것을 점점 피하게 되었다.
어릴 때 대관령 아래 산촌에 살던 시절 배를 곯았던 기억은 크게 없지만 입에
어제가 백로(白露)였다. 이맘때는 낮 더위도 완전히 가시고, 밤이 되면 기온이 크게 떨어져 공기중에 있던 수증기가 엉겨 풀잎에 이슬이 맺힌다. 그래서 흰 이슬 맺히는 절기라는 뜻으로 백로라고 부른다. 앞선 절기 처서(處暑)가 여름이 물러간다는 뜻이라면 백로는 말 그대로 가을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가을은 낮엔 따뜻한 햇살과 함께 오지만, 밤엔 이슬과 함께
어릴 때, 집 마당에서 개를 키웠다. 요즘 집 안에서 키우는 작은 애완견이 아니라 집을 지키고, 나중에는 팔려 가기도 하는 큰 개였다. 바로 옆에 사는 작은집도 개를 키웠다. 두 집의 할아버지가 형제니까 할아버지들도 늘 왕래하시고, 가족들도 늘 왕래했다.
사람이 친하니 당연히 개들도 친해져 사람 따라 왔다 갔다 했다. 어떤 때는 먹이도 같이 먹었다
보통 외출을 할 때 두 가지만 필수적으로 잘 챙기면 된다. 지갑과 휴대폰이다. 돈 쓸 일이 없거나 연락할 곳도 받을 곳도 없다 해도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놓고 외출하면 왠지 하루 종일 불안하다. 여기에 운전을 하는 사람이면 자동차 열쇠 하나를 더 챙겨야 한다. 자동차 열쇠는 빈손으로 나갔다가도 자동차를 탈 때 바로 알아채고 다시 돌아와 들고 나가지만 지
확실히 예전 여름보다 요즘 여름이 더 더운 것 같다. 예전에 시골에 살 때는 에어컨은커녕 선풍기조차 없어도 지금보다 시원했다. 느낌뿐일지 모르지만 마당가 감나무 아래 혹은 동네 한가운데 느티나무 아래 거적을 내어다 깔고 누워 부채를 부치며 새소리와 매미소리를 듣는 것도 참 시원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시원한 게 마당가에 짓는 공중 다락이다.
공중 다
‘비유법’을 사전에서 찾아 보면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그와 비슷한 다른 것에 빗대어 나타내는 수사법”이라고 나와 있다. 시와 산문의 문학뿐 아니라 각종 제품의 홍보 문구, 어떤 단체의 좌우명이나 슬로건도 재미있게 표현해 기억에 남게 하고 눈에 잘 띄도록 적절한 비유를 사용한다. 아마존의 원시림을 지구의 허파에 비유하거나 출퇴근 때마다 숨이 컥컥 막히는
요즘도 가끔 남몰래 대마초를 피우다 발각돼 신문이고 텔레비전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연예인이 있다. 그런 신문 기사나 방송 뉴스를 접할 때면 집집마다 삼밭을 가꾸던 어린 시절의 일이 생각난다. 삼밭이라니까, 모르는 사람은 혹 인삼밭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인삼밭이 아니라 삼베를 얻는 삼밭 이야기이다.
우리 집도 대관령 아래 꽤 넓은 삼밭이 있었다. 그땐
날이 너무 가물고 덥다. 비가 오지 않으니 논밭의 곡식뿐 아니라 들판의 풀들도 확실히 예년보다 무성해 보인다. 모를 내지 못한 논도 있다고 하고, 어떤 곳은 먼저 낸 모가 모두 말라 죽어 다시 모를 낸 곳도 있다고 한다. 국민총생산 가운데 논농사나 밭농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적으니 망정이지 국민의 절반 이상이 농민이었던 시절 같으면 전 국가적으로 난리가 났
나이 쉰이 되었을 때 결심한 게 몇 개 있다. 그중 하나가 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소설로 주는 위안 말고는 절대 삶이나 행동으로 남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자였다.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겠지만, 전혀 감동을 주지 않는 사람이 자기가 남에게 모범이 되고 감동을 주는 줄 알고 계속 그런 척하는 걸 지켜보는 일도 피곤하다. 나
얼마 전 은비령을 다녀왔다. 그곳은 강원도 한계령 꼭대기에서 동쪽으로 500미터쯤 가다가 만나는 샛길을 따라 오른쪽으로 다시 한계령의 다른 허리 중간을 되넘는 길이다. 애초 은비령이라는 지명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설 속에서 작가가 처음 그곳을 ‘신비롭게 감추어진 땅’이라는 뜻으로 ‘은비령(隱秘嶺)’이라고 이름 지었다.
20년 전, 작품을 발표하고
요즘 봄볕이 참 좋다. 창 안으로 들어온 저 봄볕 아래 가만히 손을 펴서 손바닥에 햇살을 담아 보면 지금 살고 있는 도시의 봄이 아니라 옛 시절 고향의 봄이 생각난다. 대관령 아래 산촌을 떠나 도시에 와 생활한 지 30년이 넘은 것 같다. 도시에서 대학을 다녔으니 그때부터 친다면 40년쯤 된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니, 달력으로만 시간이 가는 줄
학교 앞에 다리가 있었다. 이쪽 마을과 저쪽 마을에서 흐르는 물이 합쳐지는 자리였다. 어렸을 적엔 그곳에 섶다리가 놓여 있었다. 굵은 나무로 다릿발을 세우고 얼기설기 섶을 깐 다음 흙을 덮은 다리였다.
“이런 날, 다리가 떠내려가지.”
비가 오는 날 동네 아이들의 은밀한 소망이었다. 그래야 며칠 학교에 가지 않을 수 있었다. 내 기억으로 섶다리는
3월이 되었다. 우리가 봄을 기다린 마음까지 합친다면 어느새 그 봄이 아주 깊숙이까지 들어온 기분이다. 그러나 아직 바깥 날씨는 어떤 날은 매섭고, 또 어떤 날은 더없이 온화하다. 이러다가 갑자기 눈이 오기도 한다. 내 고향 대관령 아랫마을은 마당에 매화꽃이 핀 다음에도 눈이 내리곤 했다.
돌아보면 어린 시절 학교 개학식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임금이나 집안 어른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거나 또는 그 이름을 따서 작명하는 것을 삼갔다. 이것을 ‘기휘(忌諱)’ 또는 ‘피휘(避諱)’라고 한다. 여기서 ‘휘’는 피한다는 뜻으로 두렵고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존경의 뜻을 담아 피하는 것이었다.
사람의 이름과 몸은 운명을 같이하므로 이름이 다치면 그
마을 입구에 ‘위촌리 대동계 도배마을’이라는 커다란 안내 게시돌이 서 있다. 대관령 동쪽 아래 내 고향이다. 2017년에 대동계라니 다들 의아해할지 모른다. 우리나라 마을들의 대동계는 1571년 율곡 선생이 만든 서원향약에서 비롯되었다. 그 시절 율곡 선생은 양반과 천민을 구별하지 않고 마을의 전체 백성을 대상으로 향촌계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역사책
최근 예술계의 블랙리스트 때문에 참 여러 말들이 나오지요. 한심하기도 하고요. 그런 가운데 엊그제 또 한 권의 책을 냈습니다. 후배가 어떻게 끊임없이 쓰느냐는 말에 내가 전업작가인 점을 얘기했어요. 그러자 후배는 자신도 지금 다니는 일자리 걷어치우고 전업작가로 나서 볼까 한다는 말을 했어요. 그 말을 듣고 전업작가가 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말했습
내 책상 위 연필꽂이엔 30cm 대나무 자가 꽂혀 있다. 10여 년 전 서울 인사동에 갔다가 추억의 물건을 파는 가게에 들러 사온 것이다. 그 가게에서 철수와 영희가 나오는 1960년대 초등학교 1학년 교과서도 보고, 그 시절의 공책과 학용품도 보았다.
그중 오래도록 내 시선을 붙잡은 것이 대나무로 만든 30cm 눈금자였다. 요즘은 모두 플라스틱 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