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1978년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 납치됐고, 같은 해 신상옥 감독도 납북돼 만나게 됐습니다. 두 사람은 북한에서 영화를 제작하며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후 1986년 미국으로 망명, 1999년 영구 귀국했습니다.
영화같은 삶을 산 고 최은희 배우의 별세 소식에 네티즌들의 추모 목소리도 높습니다.
신 감독과 이혼한 최씨는 1978년 1월 홀로 홍콩에 갔다가 북한 공작원에 납치되고 이후 신 감독도 그해 7월 납북돼 1983년 북한에서 재회한다.
두 사람은 북한에서 신필름 영화 촬영소 총장을 맡으며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년), '사랑 사랑 내 사랑'(1984년) 등 모두 17편의 영화를 찍었다. 고인은 북한에서 만든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이어 일본인 납북 문제를 거론하며 북한과의 정상회담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닌 방향임을 강조했다. 이는 얼마 전 일본의 한 국회의원이 “일본은 북한이 이미 중국과 정상회담을 했고, 미국과 한국에 정상회담을 약속한 이때 우리만 제외될까 봐 더욱 호들갑을 떠는 것 같다”라고 발언한 것을 반박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아베 총리는 “북한이 대화에 적극적으로...
검찰은 진실화해위원회가 권고한 태영호 납북사건 등을 지난달 두차례에 걸쳐 재심을 청구한 바 있다.
1978년 당시 30세였던 김 씨는 해외에서 건설 노동자로 일하다가 귀국한 후 '유신헌법은 삼권분립에 반해 국민의 찬반토론 없이 제정됐으므로 철폐돼야 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청와대로 보냈다는 이유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긴급조치 9호에 따르면...
1968년 조기잡이 중 납북됐다가 간첩과 반공법 혐의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박춘환(71)씨 등 납북어부 3명이 사건 발생 49년 만에 누명을 벗었다.
전주지법 형사1부(장찬 부장판사)는 11일 반공법과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각 1년 6개월과 8개월의 징역살이를 한 박씨 등 납북어부 3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피고인 3명 중 박씨를 제외한 선장...
재심을 청구하는 사건 가운데 '태영호 납북 사건'은 대표적인 반공법 사건이다. 박모 씨는 1968년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지역에서 어로작업을 하다가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박 씨는 1975년 유죄 판결을 받고 1981년 사망했다. 이외에도 한국교원노조 총연합회 사건, 납북귀환 어부 사건,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 조총련 연계 간첩사건, 아람회 사건 포함 총 6건...
'리얼스토리 눈'은 임지현 씨의 지인들과 탈북자들을 인용해 임지현 씨의 재입북이 자진 입북인지 강제 납북인지 살펴봤다.
이날 방송에서 증언자로 나온 탈북인권연합 회장은 "북한은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 6개월이 지나면 대부분 다 처리해 버린다"며 "임지현이 살아있는지 죽어있는지 확인해보면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가족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한다. 허영숙은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다 지병으로 숨진 전 남편 이광수의 원고를 모두 모아 ‘춘원전집’을 완간하였다. 그 외 별다른 활동 없이 살아가다 1975년 77세의 나이에, 화려했지만 한도 많았을 세상을 등진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임지현 씨가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한 인물로 분류된다는 점도 강제 납북 가능성을 높인다. 2014년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인 하나원을 퇴소한 임지현 씨는 '관심 대상'으로 분류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소식통은 임지현 씨가 가족을 데려오려다가 납치된 것으로 점쳤다. 그에 따르면 "탈북자 대개는 가족을 데려오려고 하는데 이때 북한 국가보위성...
정양석 바른정당 원내수석부대표가 자진해서 재입북한 것으로 알려진 임지현 씨가 실은 납북된 것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 원내수석부대표는 18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북한 소식에 정통한 많은 전문가는 임 씨가 북한 보위부의 납북 표적이 된 것 같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내놓고 있다”라고 밝혔다.
정 원내수석부대표는 “자진 입북이면 보통...
그런데 한국전쟁 때 남편 김해송이 납북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한 기사에서는 그가 청년단체의 간부로 활동했던 것을 노린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난영은 남편을 잃고 KPK악단을 혼자 운영하다가 미8군 쇼단을 중심으로 공연단이 재편되는 전환기에 ‘김시스터즈’를 결성했다. ‘김시스터즈’는 이난영의 두 딸(김숙자, 김애자)과 조카(이민자)로 구성된 여성...
해방 후 맥아더 정부에 의해 석방된 박열은 신조선건설동맹에 이어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의 초대단장을 맡았으며, 1949년 영구 귀국했다가 한국전쟁으로 북한군에 의해 납북됐다.
1947년 1월 17일 서거한 박열의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뭍혀있다.
그가 사망한 후 43년이 지난 뒤인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해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최초의 거대한 전국적 여성조직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사업으로 의식주 생활개선 사업, 문맹 퇴치, 사상 및 예의범절교육을 실시했다.
1949년 11월 창덕여중·고 교장으로 발령 받아 부녀국장에서 퇴임하였고, 교장 재임 중 6·25전쟁이 발발하여 납북되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가 그해 10월 평양에서 탈출하였다. 1952년 여성문제연구회, 1956년 가정법률상담소, 1958년 대한어머니회 등의 여성단체를 창립하고 회장 또는 이사로 활약했다. 1970년 3·1여성동지회 부회장, 1973년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중앙여중·고교 교장으로 재임하며 여성 교육에 앞장섰다. 1961년 추계학원의 이사장이...
그는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유일한 한국인 교수로 부임해 외과의학 분야에서 명성을 떨치고 해방 후 한국 의료계를 이끌었지만 한국전쟁 중 피란을 하지 못해 납북됐다.
평북 정주 태생인 그는 경성의전 입학 후 3년 동안 한 번도 수석을 놓치지 않은 수재였다. 하지만 3·1운동에 참여했다가 10개월간 감옥살이를 하는 바람에 퇴학당하고 말았다. 출옥 후 4학년에...
이후 일본 우익교포 단체인 재일조선인거류민단을 조직해 단장을 맡기도 한 그는 1949년 고국 땅을 밟았다가 6·25 때 납북돼 북한에서 눈을 감았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최근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은 출연진을 정하고 이달 본격 촬영에 들어갔다.
그의 아버지 김용하(1896.12~?)는 일제강점기 교육자 및 서예가로 해방 후 우리나라의 첫 교육용 붓글씨 책 ‘한글습자책’을 발간하고 제주도지사를 역임했는데, 한국전쟁 중 납북됐다. 김우중은 1985년 선친을 기리기 위해 우당도서관을 건립, 제주시에 기증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베스트셀러가 된 자서전처럼 김우중은 연간 외국 체류기간이 280일을...
비전향 장기수 송환은 납북자와 국군포로 관련 단체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1960∼70년대 납북 어부 가족들의 반발이 거셌다. 그 배경에는 북한에 가족을 빼앗긴 ‘피해자’이면서도 국가의 보호를 받기는커녕 ‘혹시 납북 어부가 간첩으로 파견됐을 때 가족이 협조할지 모른다’고 의심한 정권의 ‘연좌제 차별’이라는 역사가 있었다. 슬픈 역사다.
재해대책위원장에는 안효대 전 의원, 통일위원장에 김성동 전 의원, 재정위원장에 주영순 전 의원, 북한인권및 탈북자납북위원장에 조명철 전 의원, 실버세대위원장에 최봉홍 전 의원, 재외국민위원장에 양창영 전 의원, 홍보위원장에 김석붕 전 청와대 문화체육비서관을 기용했다.
이밖에 당 수석부대변인에 변호사 출신의 부상일·김영호 당협위원장을 각각 임명했다.
6ㆍ25전쟁 납북자 142명이 추가 인정돼 공식 납북자 수가 4782명으로 늘었다.
정부는 1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황교안 국무총리 주재로 ‘제22차 6ㆍ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위원회’를 열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각 시ㆍ도지사가 위원장을 맡은 실무위원회의 사실조사와 통일부 차관이 위원장인 소위원회 심의를 거친195명을 심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