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뿌리를 찾아서]⑨금호아시아나그룹-광주 황금동 광주택시

입력 2011-12-2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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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택시 두대로 시작…세계 하늘을 날다

▲금호고속, 금남로5가 183번지 버스사업장. 금호아시아나그룹은 황금동에 광주택시 본사를 세운 후 광주의 중심인 금남로로 사옥을 이전, 광주·전남지역을 중심으로 여객운수사업을 확대했다.
‘시작은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성경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국내 주요 그룹들이 그랬던 것처럼 금호아시아나그룹도 시작은 보잘 것 없었다.

1945년 해방 이후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인 고 금호 박인천 회장은 공직에서 물러난 뒤 택시 2대로 운수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운수업이 낙후됐던 광주·전남지역에서 택시업의 전망이 밝을 것으로 예상한 고 박인천 회장은 지인들로부터 투자받은 돈을 바탕으로 광주시 황금동에 ‘광주택시’를 설립하고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고속버스 사업까지 운수사업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뿌리가 됐다.

고 박 회장은 ‘신뢰’를 무기로 성공적으로 운수사업시장에 안착했다. 보유 자동차 수량도 모자라고 비포장도로가 대부분이던 당시 도로 상황에서도 고객들이 제 시간에 택시나 버스를 탈 수 있었던 사실은 두고두고 회자됐다.

◇ 택시 두 대로 출발한 그룹의 뿌리 ‘운수업’ = 공직에서 물러난 후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던 고 박인천 회장은 지인들과 함께 약품배달사업으로 본격적인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약품배달사업으로 성공을 거둔 고 박 회장은 이후 낙후됐던 광주시의 운수사업 실태를 보고 택시업에 진출했다.

박 회장은 경찰시절 친분이 있던 강진의 갑부 유재의씨로부터 10만원(쌀 1400여가마 해당)을 빌려 1935년형 포드 5인승과 1933년형 내쉬 등 중고 택시를 구입하고 광주 황금동에 ‘광주택시’ 사무실을 열었다. 이곳이 국내 재계 10위 그룹으로 성장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모태다. 자동차가 희귀했던 그때, 광주택시는 곧 ‘빛고을 광주의 명물(名物)’이었다.

박 회장은 광주택시를 운영하면서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정시정차’였다고 전해진다. 금호아시아나그룹 관계자는 “당시에는 도로가 비포장 자갈길일 뿐만 아니라 차량운행 중 고장이 잦아 정시운행개념을 찾기 어려웠다”며 “하지만 철저한 정비와 점검으로 ‘확실한 택시’로 정평났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이후 고속버스로 눈을 돌려 운수업 확장에 나섰다. 박 회장은 노선별 승객수, 자금동원능력, 사업전망 등을 면밀히 조사한 뒤 ‘광주-장성’, ‘광주-화순’ 노선을 시작으로 버스운송업 사업을 시작했다.

택시 두 대로 시작한 박 회장의 운수사업은 불과 2년 만에 회사명칭을 ‘광주택시’에서 ‘광주여객’으로 바꾸면서 본격적인 영업확대를 꾀했다.

광주여객이 출범한지 2년만인 1950년 한국전쟁으로 영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운수업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고 박 회장은 부서진 차체와 부품을 수거해 차를 조립, 1950년 10월 말 목탄(木炭)차 2대를 조립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는 순간이었다.

운수산업의 성장가능성을 점친 고 박 회장의 선견지명으로 광주여객은 1950년대에 이미 전라남도 최대 여객운송업체로 부상했다.

하지만 박 회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역경제발전을 위해 1000여명의 종업원을 안고 쓰러져가던 전남세사를 인수, 경영정상화를 이끌어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모태기업인 광주여객자동차 사옥.
◇ 한국의 타이어산업 주도한 금호타이어 출범= 고 박인천 회장은 여객산업의 승승장구로 기뻐할 틈도 없이 타이어가 부족해 근심이 가득했다.

그는 결국 타이어를 구하는 대신 직접 생산키로 결정했다. 이 결정이 오늘날 세계 10대 타이어 메이커 중 하나인 금호타이어 전신인 삼양타이어의 출발이었다.

금호는 전남제사가 사용하던 창고를 개조해 타이어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61년 4월부터 하루 20본 정도의 타이어를 생산하기 시작했지만, 기술부족과 열악한 생산환경 등은 시판 엄두를 내지 못하게 했다.

훗날 고 박 회장은 “수십억원의 자금이 소요되는 것을 5000만환의 자금을 들여 공장을 시작했고 타당성조사, 자동차업계의 수요조사 전망 등에 대한 면밀한 검토과정도 없이 금호타이어 설립이 추진됐다”며 “모든 것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금호타이어는 장기적으로 전문기술자를 현장에 영입하고 꾸준히 설비를 개량?보강하는 노력과 함께 생산규격을 개발해 확대했다.

이같은 노력으로 1965년 3월 KS마크를 획득해 첫 결실을 보았고 이와 때를 맞춰 군납업체로 지정받아 본격적인 매출신장의 기회를 잡았다. 무엇보다도 그해 10월 태국에 타이어 200본을 수출해 해외시장에도 진출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어 금호타이어는 1969년 연산 25만본규모로 생산능력을 확장했다. 197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생산능력을 확대한 금호타이어는 1973년 미국의 유니로얄과 기술제휴를 맺고 래디알타이어 개발기술을 제공받기 시작한 금호타이어는 이로써 74년 당시 국내최대의 타이어메이커로 부상했다.

◇ 1970년대 지주회사 도입…금호아시아나그룹 출범 = 고 박인천 회장은 1973년 지주회사인 금호실업을 설립하면서 금호아시아나그룹체제를 출범시켰다.

특히 당시로써는 획기적이었던 지주회사체제를 도입했다. 지주회사인 ‘금호실업’은 박인천 회장의 아호인 ‘금호’(錦湖)를 따서 세운 것이다. 금호실업은 그해 1월부터 3월까지 금호타이어, 금호고속, 전남제사, 금호석유화학에 대해 법인주주간의 전환은 물론 개인주주도 법인주주로 전환해 해당 주식을 100% 인수해 명실상부한 지주회사의 틀을 갖췄다.

금호실업은 또 계열사 통합관리를 위해 ‘투자사업부’를 설치해 신규사업을 추진함과 동시에 그룹 공채사원 모집과 교육 등 전반적인 인력관리를 통해 그룹 출범 4년만인 1977년 계열사를 12개로 확대했다.

이후 금호아시아나그룹은 그룹의 대표계열사로 자리잡은 항공사업에도 진출한다. 1988년 12월15일 아시아나항공의 김동휘 기장이 미국으로 날아가 인수해 온 ‘보잉737-400’ 1번기가 꼬리날개에 색동 줄무늬를 상하로 두르고 부드러운 회색으로 동체를 도장한 모습으로 세상에 공개됐다.

당시 금호그룹 2대 회장인 박성용 회장을 비롯한 임직원들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아시아나 만세”를 외쳤다.

아시아나는 최신기종을 잇따라 도입했고 1990년 1월10일 서울∼도쿄노선에 ‘색동날개’를 투입시키면서 마침내 국제무대에도 화려하게 진출했다.

이로써 아시아나항공은 대한항공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항공사로, 또 세계 최고의 서비스를 인정받으면서 글로벌 항공사로 자리매김했다.

▲금호고속 본사가 있던 부지는 현재 고속버스터미널로 바뀌었다.
◇ 위기와 극복 반복한 오뚝이 경영= 최근 금호아시아나그룹 상황은 위기로 대변된다. 하지만 금호아시아나그룹이 곧 위기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높아지는 것은 그동안 위기가 닥쳤을 때마다 현명하게 극복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역사에서 최대의 위기로 평가되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금호아시아나그룹도 생존을 위해 뼈를 깎는 구조조정이 필요했다.

당시 3대 회장이 박정구 회장은 ‘비전경영’으로 차근차근 위기를 넘겨나갔다. 박정구 회장은 GE에서 개발한 워크아웃 프로그램을 금호아시아나의 환경에 맞춘 경영혁신운동인 ‘비전 플라자’활동을 통해 원가절감·생산성 향상·품질 향상으로부터 업무프로세스 개선, 고객만족에 이르기까지 경영전반을 다루도록 했다.

아울러 계열사간 합병·지분매각·청산 등을 통해 한계사업에서 철수하고 비주력사업부문을 정리했다. 그결과 1997년 32개였던 계열사를 2001년에는 15개로 축소했다. 또 자본유치, 부동산 및 유가증권 매각, 유상증자 등을 통해 1998∼2001년사이에 약 3조원가량의 유동성을 확보해 차입금을 상환, 97년말 966%에 이르던 그룹 부채비율을 2001년말 360%로 낮추는 등 재무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시켰다. 이같은 박회장의 발빠른 행보와 임직원들의 피나는 자구노력에 힘입어 금호아시아나는 지난 99년, 창사이래 최대 흑자인 약 242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올리는 성과를 거두며 IMF파고를 헤쳐나갔다.

이같은 노력을 벌인 끝에 2003년 7월 1일은 IMF 사태 이후 지속한 구조조정을 완료했다.

최근에도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대우건설과 대한통운 인수에 따른 후유증으로 뼈를깎는 구조조정을 겪고 있다. 그룹 회장인 박삼구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난 후 복귀하는 등 진통을 겪었지만 위기 때마다 이를 극복했던 전례가 있어 시장에서도 그들의 부활이 이뤄질 것으로 전망하는 시각이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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