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고객만을 생각하고 달려온 이랜드의 30년

입력 2010-09-1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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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랜드의 성장 비결은 'M&A와 정도경영'

1980년 9월23일. 이화여대 광생약국 앞에 작은 보세 옷 가게 ‘잉글랜드’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때는 아무도 몰랐다. 자그마한 이 가게가 훗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패션유통기업이 될 줄은. 올해 창업 30주년을 맞는 이랜드그룹 얘기다.

불과 10여명의 직원으로 출발한 이랜드는 30년만에 국내 직원 6500여명 해외 2만2000명을 거느린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86년 법인화 당시 66억원 수준이던 매출은 올해 7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무려 1000배가 넘는 규모로 성장한 셈이다.

패션사업으로 출발한 이랜드는 유통, 건설, 레저, 외식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하며 30대 그룹에 진입했다. 특히 올해 중국 매출은 국내 패션기업 최초인 1조원 돌파가 예상된다.

30년 세월에 무탈할 수만은 없는 법. IMF라는 초유의 상황에서 이랜드 역시 그룹의 존립을 장담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지만, 정도경영과 지식경영으로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홀로 설수 있는 이립(而立). 서른 살 이랜드의 역사는 수 많은 시련과 도전을 혁신으로 극복해 온 드라마다.

◇근육무력증 이겨낸 28세 청년의 創業= 부자가 되는 게 꿈이던 청년 박성수.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갑작스레 찾아온 ‘근육무력증’조차 그의 이런 꿈을 접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병마와 사투한 2년여 동안 섭렵한 3000여 권의 책들은 창업의 자양분이 됐다.

하지만 병을 이겨낸 28세 청년 앞에 놓인 입사연령제한. 감수성이 풍부하고 평소 그림 그리길 좋아하던 박 회장은 의류 사업을 결심했다. 잘 해낼 자신감도 충만했다.

‘눈 있는 사람이 놀라는 가게’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매장은 문을 열자마자 대박이 났다. 이전 무채색 계열과는 전혀 다른 원색의 화려한 색상, 눈에 띄는 커다란 알파벳 문양, 실용적인 캐주얼 디자인. 거기에다 학생들이 용돈으로도 살 수 있는 가격으로 청소년과 대학생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입 소문을 타면서 ‘잉글랜드’매장 분점을 내고 싶다는 고객도 생겨났다. 박 회장은 가맹비와 로열티를 받고 회사는 브랜드를 기획하고 디자인에 전념한다면 더욱 좋은 옷을 만들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당시는 생소한 패션 프랜차이즈 개념을 국내 최초로 도입한 것이다. 86년에는 상호도 현재의 이랜드로 바꿨다. 국가 명은 상표등록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보세 의류에서 손을 떼고 직접 디자인한 브랜드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중저가 블루오션 개척 '이랜드 神話'의 탄생= 80년대 이랜드는 국내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이랜드신화’를 낳았다. 83년 브렌따노를 시작으로 85년 언더우드, 89년 헌트, 리틀브렌등 내놓는 브랜드마다 공전의 히트를 쳤다. 특히 헌트는 1993년 월 100억원, 그 해 1000억원의 매출을 올리며 단일브랜드로는 국내 최초 연간 매출 1000억 원을 돌파한 패션브랜드에 등극했다.

백화점과 재래 시장으로 양분된 국내 시장에서 본격 캐주얼 시대를 연 이랜드는 합리적인 가격으로 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국민 브랜드로 부상하면서 86년 법인 설립 첫해 66억 원에 불과하던 매출은 연 평균 200~300%씩 고공 비행 했다.

대리점 확장 추세도 놀랍다. 가맹점 수익을 고려해 상권 중복의 신규 매장 개점을 억제하는 등으로 가맹점을 열기 위해서는 평균 6개월 이상 대기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86년 90개였던 가맹점수가 93년에는 2000개를 넘어서며 급속히 증가했다.

명동, 종로 등에선 이랜드가 운영하는 매장이 줄지어 늘어선 ‘이랜드 스트리트’가 생겨났고, 심지어 이랜드 매장 옆에 있으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집객효과가 대단했다.

프랜차이즈 후드티를 뜻하는 ‘맨투맨’은 박 회장이 용어를 만들었고, 구김이 안가는 ‘링클프리’ 면바지 역시 이랜드가 최초로 상품화했다. 프랜차이즈 방식은 아이디어만 있으면 적은 자본으로도 안정적인 판로와 수익을 기대할 수 있어 대기업이 독점하던 시장의 진입장벽을 낮춰 패션산업의 저변이 확대되는 전기를 가져 오는데 기여했다,

◇사업구조 다변화 '그룹의 모습을 갖추다'= 한국경제가 급상승하던 90년대. 이랜드는 패션전문기업에서 점차 그룹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94년 당산동에 ‘2001 아울렛’을 열며 유통업에 진출한 것을 비롯해 같은 해 이탈리아 정통 피자전문점 ‘피자몰’을 열며 외식사업을 전개하고, 96년에는 호텔사업에도 뛰어들었다.

국민 소득이 높아지면 삶의 질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산업이 발전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의(衣)ㆍ식(食)ㆍ주(住)ㆍ미(美)ㆍ휴(休)로 대표되는 지금의 사업영역도 대부분 이 시기에 틀이 짜였다.

무엇보다 패션을 잇는 제2의 성장엔진이 절실했다. 브랜드가 늘면서 생겨나는 패션재고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도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박 회장은 국내에 백화점 이외 중산층이 이용할만한 유통채널이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2년 여간 TF팀을 꾸려 유통시장 조사에 나서 신개념 유통사업을 구체화했다.

1994년 4월 개점한 ‘2001 아울렛’ 당산점은 이랜드의 이런 고민을 단방에 해결했다. ‘백화점을 할인한다’는 슬로건으로 백화점처럼 쾌적하지만 가격은 50~80% 저렴한 새로운 유통공간은 소비자와 업계의 큰 반향을 불러왔다.

층별로 상품군을 묶고 밝은 조명과 깔끔한 인테리어, 여기에 식품까지 구입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매장은 고객들로 연일 북적댔다. 미국의 교외형 아울렛과 달리 국내자동차 보급률을 감안해 선택한 ‘도심형 아울렛’ 전략도 적중했다.

94년 28억원을 기록했던 아울렛 매출은 이듬해인 95년에는 3개 매장에서 542억원으로 급증했다. 아울렛 사업 출범 5년만인 99년에는 매출이 3천억 원에 육박하며 패션과 더불어 이랜드그룹의 주력사업으로 빠르게 자리매김했다.

‘2001 아울렛’에는 2000년대 유통 1위 기업이 되겠다는 포부가 담겨있다. 지난 해 이랜드 그룹은 31개의 아울렛 매장에서 3조2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유통기업 1위 를 향한 꿈은 현재진행형이지만, 아울렛분야에서 이랜드 위상은 가히 독보적이다.

이랜드의 해외 진출 시점도 이 무렵이다. 1994년 국내 시장 생산기지 차원에서 국내 최초로 진출한 중국에서 매년 50% 이상 성장을 거듭하며 올해 1조 3천억 원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이랜드의 철저한 현지화, 시장조사 전략은 중국에 진출한 국내 기업의 롤 모델로 꼽힌다. 중국, 인도 파키스탄 등 해외 글로벌 인프라 구축도 동일한 같은 시기에 추진했다. 해외 소싱 역시 이랜드가 최초다.

◇위기에서 이랜드 구한 정도 경영= 97년 말 IMF가 터지면서 순항하던 이랜드는 최대 시련을 맞았다. 세계 최고 수준의 탄탄한 수익구조. 하지만 금융기관들의 무차별적인 자금 회수는 흑자경영에 있던 이랜드를 코너로 내몰았다. 일시적인 자금 유동성 부족은 급기야 부도 일보 직전의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절체절명의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국내 투자기업을 물색하던 외국인 투자자로부터 400억 원의 거액을 유치한 것. 기사회생의 순간이었다. 투자자는 사모펀드인 ‘워버그 핀쿠스’. 다른 기업과 달리 이랜드는 이중 장부를 갖고 있지 않아서라는 게 이유였다.

더불어 실사 과정에서 ‘워버그 핀쿠스’로부터 익힌 기업실사에 대한 선진기법은 뒤에 이랜드가 보여준 수 많은 M&A에 밑거름이 됐다.

"외국인 투자가가 1년간 나머지 돈을 투자하지 못하고 있길래 이상해 물어봤더니, 막상 기업을 사려고 하면 그 회사의 장부가 두 개랍니다. 사실 우리 회사도 장부가 하나라서 투자했다는 겁니다. 제가 얻은 결론은 하나입니다. 정직하면 손해 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일 때는 정직해서 살아 난 다는 것입니다."(박 회장 회고 中)

‘기업은 이익을 내는 과정에서 정직해야 한다’. 이랜드의 4대 경영이념 중 하나인정도경영, 그리고 지식경영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랜드는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기적은 결코 저절로 오는 행운이 아니다.

◇제2의 도약 날개, ‘지식경영’ ‘M&A’= 이랜드가 단기간에 고속성장 할 수 있었던 비결은 기업인수 합병을 통해 끊임없이 몸집을 불리고 사업을 다각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M&A는 이랜드그룹의 가장 중요한 성장전략이다.

1995년 뉴설악호텔(현 설악산켄싱턴호텔) 인수를 시작으로 M&A시장에 뛰어든 이랜드는 이후 패션과 유통 레저부문에서 20여개 회사를 인수하면서 시장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잘 나가는 회사를 비싼 가격에 인수하는 기존의 M&A 방식과는 달리 일시적으로 또는 구조적으로 경영난에 빠진 기업을 싸게 인수해서 조기에 정상화 시킨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지난 2006년 한국까르푸를 인수했다 2년만에 되파는 우여곡절도 겪었지만 제때 제값을 받고 매각함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저력을 보였다. 이랜드는 최근 M&A대상을 해외로까지 확대하고 있다.2008년 금융위기 당시 어려움을 겪던 베트남의 상장기업 탕콤을 인수해 경영을 정상화 시켰으며 이탈리아의 글로벌 패션기업 벨페와 라리오를 인수했다.

뿐만 아니라 지난 2006년 인수한 네티션닷컴의 간판 브랜드 ENC를 이랜드가 탄탄하게 기반을 다져놓은 중국시장에 진출 시킴으로써 국내외 M&A시장에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이랜드가 M&A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창업초기부터 착실하게 다져온 지식경영이 밑거름이 됐다.기업은 생산성 향상과 혁신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하며 지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박성수회장의 신념 하에 창립초기부터 직원들의 교육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직원들이 연간 읽어야 하는 필독서가 수십권에 달하고 박성수회장이 추천하는 필독서 목록을 구하기 위해 다른 기업 담당자들이 혈안이 됐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

이랜드의 M&A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유는 인수한 부실기업들을 대부분 지식경영을 통해 제대로 회생시켰다는데 있다. 법정관리중인 적자상태에서 인수한 뉴코아와 해태유통이 아울렛과 SSM으로 경영정상화에 성공해 주력계열사로 자리매김 했으며 삼립 하일라콘도, 한국콘도 등도 재기의 발판을 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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