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볼 때 주인공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을 눈여겨보는 편이다. 그 행동에 인물의 성품이나 영화가 앞으로 흘러갈 방향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김진유 감독의 두 번째 장편 ‘흐르는 여정’에서 춘희(김혜옥)가 처음으로 하는 일은 화단에 물을 주는 것이다. 단순하게(혹은 거창하게) 말하면, 그것은 생명을 돌보는 일이다. 물을 준다고 당장 꽃이 피는 건 아니다. 춘희의 목적 역시 꽃 피우기에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는 그저 지금 자라고 있는 것에 제 손이 닿는 만큼 물을 준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에서 지휘자 민준(저스틴 민)과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소년 성찬(박대호)을 만났을 때도 춘희는 그렇게 한다. 춘희는 독일에서 엄마를 찾아 한국에 온 민준에게는 마음 놓을 자리를, 피아노를 치고 싶은 성찬에게는 건반 앞에 앉을 자리를 내어준다. 화단에서 시작된 춘희의 손길이 두 사람의 일상에까지 가 닿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물(水)은 영화의 중요한 물성(物性)이자 춘희가 일상을 돌보는 방식을 보여준다. 영화에는 유독 비 오는 장면이 많은데, 비가 내리면 춘희는 이웃들이 오가는 복도와 계단에 고인 빗물을 쓸어낸다. 남편이 남긴 자동차와 피아노는 젖은 수건으로 날마다 닦는다. 춘희에게 청소는 세수다. 얼굴을 씻듯 매일 닦아야 살아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영화에 인용된 천명관의 소설 속 문구처럼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다. 그리고 죽음이란 그저 먼지가 쌓이는 일이다. 말하자면 춘희는 먼지를 닦아내는 사람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흐르는 여정’의 카메라는 인물 위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듯 그 사람의 모습을 온전히 비추려 한다. 춘희가 아플 때 카메라가 어디에 서 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약을 먹는 춘희는 베란다 너머의 이차프레임에 담긴다. 춘희가 통증에 시달릴 때 카메라는 화장실 바깥에 머물고, 혈액 투석을 마치고 나오는 모습은 롱쇼트로 잡는다. 얼굴에 바짝 다가갔다면 춘희의 고통은 한층 생생하게 전해졌을 것이다. 한발 물러선 자리에서는 아픈 춘희와 그가 하루를 보내는 공간이 함께 보인다. 특히 영화 초반에 약을 먹는 춘희 너머로 창밖의 나무가 눈에 들어오는 것도 그 거리에서다. 카메라가 남겨둔 화면의 여백만큼, 영화는 춘희의 고통보다 그가 있는 공간과 풍경을 함께 담으려고 노력한다.
감독은 인물의 사연에도 이만한 거리를 둔다. 춘희가 수어를 가르쳤고 병원에서 통역 봉사를 하다 농인인 남편을 만났다는 사실은 영화가 한참 흐른 뒤에야 드러난다. 민준이 어릴 적 독일로 입양된 사정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성찬의 과거사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는 인물의 사연에 천착하지 않는다. 마치 상대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의 태도 같다. 엄마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느냐는 민준의 물음에 춘희는 그저 낳아줘서 고맙다고 말하라고 한다. 어쩌다 독일까지 가게 됐는지 캐묻는 대신, 민준이 지금 건네고 싶은 말을 함께 생각해 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건넬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민준이 그 사실을 알고 슬퍼하는 동안 춘희는 묵묵히 곁을 지킨다. 안락사와 입양처럼 제법 무거운 사연을 품고도 영화에 숨 쉴 틈이 있는 건, 감독 역시 춘희처럼 한 사람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기 전에 그 곁에 머물 줄 알기 때문이다.

춘희와 민준, 성찬을 이어주는 건 피아노다. 춘희가 내어준 피아노를 성찬이 연주하고 민준이 조율한다. 소리를 듣지 못했던 춘희의 남편은 건반을 칠 때 전해오는 진동으로 피아노를 즐겼다. 같은 건반도 어떻게 누르느냐에 따라 울림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같은 연주를 듣고도 사람마다 떠올리는 풍경이 다르다. 춘희와 민준은 성찬의 연주를 두고 숲에 내리는 비와 큰 바다, 눈이 내려 새하얘진 산과 넓고 깊은 호수를 이야기한다. 물이 담기는 곳에 따라 모양을 바꾸듯, 성찬이 친 선율은 두 사람에게 저마다 다른 풍경이 된다. 그런 성찬에게 춘희는 내일 죽는다면 오늘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묻는다. 바로 다음 쇼트에서 성찬은 피아노를 친다. 그게 소년의 대답인 셈이다. 내일이 마지막이라 해도 오늘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여태껏 좋아했던 일을 한 번 더 해보는 것일 수 있다. 성찬에게는 어제처럼 피아노 앞에 앉는 일이다.
한편 세 사람을 이어주는 피아노는 남편이 남긴 물건이라는 점에서 가부장의 기호이기도 하다. 그 의미는 집과 차의 열쇠가 건너가는 장면에서 선명해진다. 딸처럼 춘희의 곁을 지키며 스위스까지 동행한 나경(공민정)은 돌아와 춘희의 편지와 함께 열쇠를 민준에게 건넨다. 딸에게는 돌봄이, 아들에게는 상속이 돌아가는 셈이다. 더구나 민준은 춘희에게 아들 같은 사람이면서 남편과 취미가 겹쳐 때로는 그 빈자리까지 떠올리게 한다. 열쇠의 행방을 따라가면 남편의 재산을 아내가 아들에게 물려주는 익숙한 구도가 드러난다. 그 마지막 전달마저 나경의 몫이다. 자기 생의 마지막을 스스로 정한 춘희가 상속의 순간에는 남편과 민준 사이를 잇는 사람으로 남는다는 점도 못내 걸린다. 혈연 바깥에서 가족이 되는 과정을 그토록 섬세하게 그린 영화는 돌봄과 재산을 나누는 순간 오래된 가부장의 질서로 되돌아간다.
영화 후반부, 성찬은 지는 해에 붉게 물든 바다 앞에서 춘희가 준 카메라로 춘희를 찍는다. 어디까지가 물빛이고 어디부터가 해의 빛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저녁, 카메라는 죽음을 앞둔 춘희와 그 뒤에도 살아갈 두 사람을 검은 실루엣으로 한 프레임에 담는다. 서로를 끌어안은 세 사람의 실루엣은 함께 살아온 시간을 켜켜이 쌓아 올린 생(生)의 부도(浮屠) 같다. 그 모습을 보고 나면 스위스로 떠나기 직전 춘희가 두 사람에게 건넨 말이 조금 다르게 들린다. “난 아주 멋지게 살고 있을 거야.” 죽음을 앞둔 사람이 앞으로의 삶을 이야기한다. 물빛과 해의 빛이 뒤섞인 저녁 바다처럼 그 말속에서도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흐려진다. 영화는 그 말을 한 번 더, 이번에는 이미지로 건넨다. 정황상 이미 세상을 떠났을 춘희가 민준과 성찬의 연주회 객석에 앉아 있다. 그것은 정말 춘희일까?
‘흐르는 여정’은 춘희가 집을 나서면서 시작하고, 민준과 성찬이 그 집으로 돌아오면서 끝을 맺는다. 영어 제목 Journey There의 ‘그곳’은 춘희에게 오래 준비한 여행의 끝이다. 민준과 성찬에게는 춘희와 함께 지낸 시간을 품고 다시 살아갈 집이다. 춘희가 날마다 닦던 피아노에서는 이제 성찬의 연주가 흐를 것이다. 춘희가 돌보던 것들이 그 집에서 두 사람의 일상으로 이어진다. 그러고 보면 첫 장면에서 춘희가 화단에 준 물은 어디까지 흘러갔을까. 그 물은 돌아온 민준과 성찬의 하루에까지 가 닿았는지도 모른다. 춘희는 아마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은 그저 눈앞에 있는 것들이 잘 자라기를 바랐을 테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