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개정 상법으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이 회사뿐 아니라 주주까지 확대되면서 이사의 법적 책임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이사가 책임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내리고 그 근거를 문서화하는 한편, 내부통제시스템이 실질적으로 작동하도록 관리해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삼일PwC 거버넌스센터는 ‘거버넌스 포커스 제39호’를 통해 국내 기업 이사회를 위한 전문가 제언을 담은 ‘이사회 가이드’ 일곱 번째 시리즈를 발간했다고 28일 밝혔다. 이번 호에는 정준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이사의 법적 책임, 알고 대비하기’를 주제로 기고해, 이사가 부담하는 주요 의무와 책임을 정리하고 실무적 대응 방안을 제시했다.
기고문은 이사가 직접 업무를 수행하거나 이사회 안건을 검토·결정할 때 반드시 유의해야 할 원칙으로 ‘경영판단의 원칙(Business Judgment Rule)’을 꼽았다. 이 원칙에 따라 보호받기 위해서는 △합리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수집·조사·검토할 것 △회사의 최대 이익에 부합한다고 합리적으로 신뢰하며 신의성실에 따라 판단할 것 △결정 내용이 통상적인 이사를 기준으로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범위에 있을 것 등 세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다만 법령 위반 행위에는 경영판단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도 강조했다. 담합 등 위법행위로 회사가 과징금 등의 손해를 입었다면, 해당 행위가 회사에 이익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사의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법령 위반 행위 자체가 회사에 대한 채무불이행으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사회 안건에 반대했다면 해당 의견이 의사록에 정확히 기재됐는지도 이사가 직접 확인해야 한다. 상법 제399조 제3항에 따르면 이사회 결의에 참가한 이사 가운데 이의를 제기한 사실이 의사록에 기재되지 않은 사람은 해당 결의에 찬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 교수는 “실제 회의에서 반대 의견을 냈더라도 의사록에 남지 않았다면 책임을 부담할 가능성이 있다”고 조언했다.
기고문은 이사의 감시의무와 내부통제 시스템 구축 및 운영의 중요성도 짚었다. 이사의 의무는 이사회에 상정된 안건에 찬반 의사를 표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표이사와 업무담당이사의 전반적인 업무집행을 감시하는 데까지 미친다. 과거 대우그룹 분식회계 사건에서 법원은 회계가 담당 업무가 아니었고 분식회계 사실을 알지 못했던 임원에게도 책임을 인정한 바 있다. 정 교수는 “'임직원들이 법을 위반해 부당하게 돈을 벌었지만 나에게 보고하지 않아 전혀 몰랐다'는 식의 항변은 통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사는 임무 위배 행위에 관여하지 않았거나 이를 몰랐다는 이유만으로 면책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특히 윤리강령 제정, 윤리경영 교육, 준법지원인 선임, 전사적 위험관리 체계 및 내부회계관리제도 구축 등 형식적 요건만 갖춰서는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위법행위가 의심되거나 확인될 때 관련 정보를 수집·보고할 수 있는 체계와 내부제보시스템이 실질적으로 운영돼야 하며, 독립적인 조사와 징계가 실제로 이뤄진 운영 이력(track record)을 확보해야 한다. 정 교수는 “위법행위가 장기간 반복됐는데도 회사가 이를 적발하거나 통제하지 못했다면, 그 자체로 내부통제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될 위험이 크다”고 분석했다.
기고문은 이사가 의무를 위반했을 때 부담할 수 있는 민사책임과 형사책임도 다뤘다. 민사책임은 회사에 대한 책임과 주주·채권자 등 제3자에 대한 책임으로 나뉜다. 회사가 이사에게 책임을 추궁하지 않으면 일정 지분율 이상을 보유한 주주가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기고문은 2025년 개정 상법으로 이사의 충실의무가 주주에게까지 확대되면서 이러한 소송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또한 한국은 주요국과 비교할 때 이사의 의무 위반을 형사책임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은 편이라고 지적했다. 다만 배임죄 구성요건을 개편하려는 논의가 이어지고 있고, 이사의 민·형사상 면책 기준을 명확히 하기 위해 경영판단의 원칙을 법률에 규정하려는 시도도 있었던 만큼 향후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정 교수는 이사의 법적 책임 확대에 대한 우려와 관련해 “경영판단의 원칙에 따라 신중하게 의사결정을 하고 감시의무를 다하며 내부통제시스템을 제대로 구축 및 운영한다면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며 “특히 개정 상법 아래에서는 의사결정 절차의 문서화는 물론, 해당 결정이 주주 전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주주 간 이해관계가 충돌하지는 않는지 검토한 내용도 함께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신왕건 삼일PwC 거버넌스센터장은 "이사의 충실한 의무 이행은 개별 이사의 노력만으로 이뤄지기 어렵다”며 “특히 독립이사가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체계와 자원을 함께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삼일PwC는 학계와 실무 전문가의 기고로 구성된 '이사회 가이드' 시리즈를 매월 발간하고 있다. 기고문의 자세한 내용은 삼일PwC 거버넌스센터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