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베어허그’의 발톱

입력 2026-09-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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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부동산 사업가 조너선 라모어는 2023년 파산 직전이던 위워크에 7700만달러 규모의 인수 제안을 발표했다. 실체 없는 껍데기 회사를 앞세운 가짜 인수 제안이었다. 보도자료가 나간 지 1분 만에 주가는 시간외거래에서 70% 넘게 뛰었다. 다음 날에는 주가가 150% 이상 치솟았다. 조너선은 미리 사둔 콜옵션(주식매수선택권)으로 차익을 노렸다. 사전에 세운 작전대로 기회가 왔지만, 콜옵션 행사 타이밍을 잘못 맞히면서 원하는 이익을 챙기지 못했다. 시장은 이미 한 차례 크게 흔들린 뒤였다. 법원은 그에게 5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주가가 급등락하는 동안 고점에 물린 개인 투자자들은 대규모 손실을 떠안아야 했다.

쿠웨이트 국적의 한 트레이더는 2009년 중동 투자그룹이 하만인터내셔널을 인수한다는 허위 보도자료를 언론에 뿌렸다. 하만 주가가 하루 만에 40% 넘게 오르면서 이 트레이더는 주식을 되팔아 차익을 챙겼다. 그는 앞서 텍스트론을 상대로도 똑같은 수법을 썼다. 2015년에는 불가리아 소재의 투기 세력이 에이본, 타워그룹, 로키마운틴초콜릿팩토리 3개 회사를 상대로 허위 인수 서류를 연달아 제출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의 제재를 받았다. 모두 ‘베어허그법’이 있는 미국 주식시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오기형 더불어민주당 K-자본시장 특별위원회 위원장은 최근 한국형 베어허그법으로 불리는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상장사가 주주가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인수 제안을 받으면 이사회가 접수 내용과 검토 계획을 즉시 공시하도록 했다. 또 독립적·전문적 절차를 거쳐 공개매수에 대한 의견(수용·거절·중립 등)을 밝히고, 이사회 논의 경과와 사유를 공시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기업이 의도적으로 주가를 낮게 유지하는 일명 ‘주가 누르기’를 방지하겠다는 취지의 법안이다.

하지만 법안 내용에 인수합병(M&A) 시도로 차익을 얻으려는 세력의 무분별한 또는 허위 인수 제안을 막을 법적 장치는 없다. 미국과 영국, 일본 등 자본시장 선진국이 관련 제도를 유지하는 것은 불손한 세력에 대한 견제장치가 충분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신주인수선택권(포이즌필·독소조항) 같은 경영권 방어수단을 법원이 폭넓게 인정한다. 2011년 에어프로덕츠가 에어가스에 시가 대비 61% 프리미엄을 제시했을 때도 미국 델라웨어주 법원은 포이즌필을 동원한 에어가스 이사회의 경영권 방어를 정당하다고 인정했다.

영국은 인수 의향을 공개한 뒤 28일 안에 정식 제안을 하거나 철회하도록 강제하는 규정을 뒀다. 이른바 ‘찔러보기식’ 제안이 시장을 장기간 흔들지 못하게 막으려는 장치다. 일본 경제산업성 가이드라인도 이사회가 성실하게 검토해야 할 대상을 ‘진지한 제안’으로 한정했다.

현재 발의된 한국형 베어허그법에는 인수 제안의 ‘진정성 없음’을 걸러낼 장치도, 공격에 맞설 방어수단도 담기지 않았다. 피인수 기업 이사회의 공시 의무와 미이행 시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내용만 포함됐다. 상장사가 인수 제안을 받고 이사회가 접수 내용과 검토 계획을 즉시 공시하면 그 자체로 주가에 강력한 신호로 작용한다. 진짜 인수 의지나 자금력이 없더라도 그럴듯한 제안서 한 장과 보도자료 배포만으로 저평가 기업의 주가를 단기간 들썩이게 만들 길이 열리는 셈이다.

베어허그법 추진과 동시에 인수 제안의 진지성을 검증할 기준과 허위·투기적 제안에 대한 제재, 그리고 최소한의 경영권 방어수단이 함께 도입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가치 제고라는 명분 아래 새로운 형태의 주가조작 세력이나 투기 세력을 양산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lj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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