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정부 지원에 의존하던 중국 반도체 기업이 이제는 거대한 민간 자본까지 등에 업고 글로벌 시장에 실탄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자국 내 완결형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중국의 굴기가 새로운 국면에 진입한 것이다.
더 큰 위협은 자본을 넘어선 ‘기술 역전’의 현실이다. 최근 본지가 단독 보도한 ‘2025년 산업기술수준조사’ 결과를 보면 한·중 간 산업기술 격차가 불과 1.1%포인트(p)로 좁혀진 것을 넘어 국가 미래 경쟁력을 좌우할 차세대 반도체 분야 기술수준에서는 중국(82.1%)이 한국(79.2%)을 이미 추월했다.
과거 우리가 중국을 ‘저가 범용 칩을 찍어내는 후발 주자’로 평가절하하는 사이 그들은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첨단 공정의 문턱을 넘어 우리를 앞지른 것이다. 차세대 패키징 등 신기술 분야의 추격 속도도 매섭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800조원 규모로 추진 중인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구상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광주·전남 일대에 대규모 팹(Fab) 4기를 짓겠다는 이 메가 프로젝트는 철저히 ‘메모리 반도체’ 대량 생산에 방점이 찍혀 있다. 글로벌 AI 시장 성장 가속화 속에 부지·전력·공업용수 확보가 사실상 한계에 달한 수도권을 벗어나 생산 거점을 서남권으로 다각화한다는 정책적 취지 자체는 타당하다.
하지만 막대한 재원을 투입해 메모리 ‘규모’만 늘리는 것이 2030년대의 정답일지는 미지수다. 메모리 반도체는 제품 특성상 수요와 공급에 따른 가격 변동성이 극심하다. 거대한 민간 자본과 차세대 기술까지 흡수한 중국이 본격적인 물량 공세에 나선다면 과거의 출혈적 치킨게임이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 신규 팹이 본격 가동될 2029년 무렵, 자칫 우리가 지은 거대한 메모리 공장들이 공급 과잉을 유발하는 구조적 부담으로 전락할 수 있다.
이제는 ‘규모의 경제’를 앞세우던 과거의 승리 공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정부는 단순한 ‘면적 늘리기’식 팹 증설을 넘어, 산업 생태계 전반의 체질을 바꾸는 핀셋 투자를 서둘러야 한다. 글로벌 공급망에서 대체 불가능한 시스템 반도체 육성과 첨단 패키징 등 고부가가치 영역으로 정책의 무게 중심을 옮겨야 할 때다.
‘초격차’라는 방패에 금이 간 지금, 메모리 편중 전략은 추격자에게 가장 좋은 먹잇감이 될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