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전주에서 한 달 살기

입력 2026-06-2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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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서 레지던스 작가로 숙소를 제공받아 한 달을 지내고 있다. 원룸 숙소에서 혼자 밥을 끓이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며 보내는 것이다. 새벽에 깨어나 푸른 갈대가 내 키만큼 자란 갈대 우거진 아름다운 전주천변을 따라 걷고, 전주 남부시장 골목 안 식당에서 뜨거운 국물에 토렴을 해서 내놓는 콩나물국밥과 수란으로 아침식사를 한다. 그리고 다시 걸어서 서학동 예술마을 도서관에서 원고를 쓰다 숙소로 돌아오는 단순하고 호젓한 나날이 이어진다.

어느덧 정수리로 쏟아지는 땡볕은 한여름의 그것처럼 뜨겁다. 그 땡볕을 받으며 앵두가 익고, 복숭아와 자두들이 익어간다. 땡볕을 견디며 단맛이 들어가는 과일들을 보면 새삼 대견하다. 스물에는 스물의 고민과 고통이 있고, 서른에는 서른에 직면한 난관과 괴로움이 있었다. 무엇엔가 깊이 찔린 어린 짐승처럼 신음을 내뱉던 그 젊은 날을 건너뛰어 나이 칠십을 넘고 나니(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젠 들끓는 야망은 내려놓고 단순하게 평화와 고요만을 꿈꿀 뿐이다.

살아보니 모든 인생이 다 평등하지는 않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어디에나 불평등이 편재한다는 게 이 세계가 품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스물 무렵 그토록 열심히 빠져 읽던 니체는 간명하게 “사람들은 평등하지 않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내게 주어진 생의 불우한 조건들을 납득하기 힘들었다. 젊은 시절 대부분을 불우한 조건들, 딱히 대상이 없는 분노와 적대감에 삼켜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싸우느라 생을 허비했다. 내가 누린 평화는 작고 그 나머지 시간은 온통 소란스러웠다. 생각하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내가 싸워야 할 적이란 무엇인가? 아무나 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찮은 적을 가진 자는 하찮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니체는 “적을 갖되, 증오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적만을 가져야 한다”라고 했다. 나이가 들었다고 저절로 없던 지혜가 갑자기 생겨나고 원숙과 달관에 이르지는 않는다. 젊은이들보다 훨씬 더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여전히 사는 일에 서툴고 능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다만 젊은 날에 견줘 안달복달하지 않는 것은 욕망의 부피를 줄인 덕분이다. 내 깜냥을 직시하고 그것에 맞춘 소규모의 인생에 만족하려고 한다.

전주에서 지낸 한 달은 좋았다. 물론 아는 사람 하나 없이 혼자 지내다보니 조금은 외롭고 쓸쓸했지만 그마저도 그윽한 데가 있었다. 전주에서 새로 나올 책의 일부를 쓰고,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전주천변의 ‘바람쐬는길’을 걸었다. 밤에는 숙면을 취하고, 새벽에는 맑은 정신으로 깨어나 책상 앞에 등을 구부리고 글을 썼다. 세월이 지난 뒤에 전주에서 보낸 한 달을 감미롭게 회상할 수 있으리라.

6월이 끝나면 짐을 챙겨 돌아간다. 내가 산 흔적을 남김없이 지우고 다음에 올 작가에게 숙소를 비워주고 떠나야 한다. 방과 욕실과 주방을 청소하고, 한 달간 쓴 침구류는 세탁소에 맡겨야 한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나이가 들어 생물학적 쇠락을 겪은 뒤 세상과 작별하고 떠나는 게 자연의 섭리이고 인간이 짊어진 불가피한 숙명이다. 우리보다 늦게 올 어린 인류에게 삶의 터전으로서 이 땅과 물과 공기를 남기고 떠나야 한다. 어린 인류에게 삶의 자원이자 터전이 될 것을 낭비하거나 더럽혀서는 안 될 일이다. 그건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생의 고매한 도덕적 의무 중 하나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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