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초 국내 금융시장이 환율 상승과 지수 신고가 경신이라는 이례적인 동행을 이어가며 기존의 시장 문법을 뒤흔들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가파른 우상향 곡선을 그리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코스피 지수는 견조한 상승 흐름을 유지하며 과거 '원화 약세=증시 하락'이라는 공식이 힘을 잃는 장세가 펼쳐지고 있다.
15일 한국거래소와 서울외국환중개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14일 3561.81이었던 코스피 지수는 전날 4723.10로 3개월 만에 무려 1161.29포인트(32.6%) 상승했다. 같은 기간 원·달러 환율이 1431.0원에서 1477.5원으로 46.5원(3.2%) 오르는 고환율 국면이 지속됐음에도 불구하고 증시는 오히려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며 환율 변수를 완전히 압도하는 모양새다.
새해 첫 거래일인 1월 2일 4309.63으로 출발한 코스피 지수는 13일 4692.64를 기록한 데 이어 14일 4723.10으로 마감하며 또 한 번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불과 9거래일 만에 지수가 약 413.47포인트(9.59%) 급등하며 기록적인 랠리를 보이고 있다. 환율 역시 가파른 수직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연말 1420원대까지 낮아졌던 환율은 보름여 만에 50원 가까이 상승해 13일 1478.50원까지 치솟았다가 14일 1477.50원으로 소폭 하락하며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환율 상승 원인으로 글로벌 달러 강세 영향이 꼽힌다. 전날 환율은 엔화 약세에 따른 강달러 기조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일본의 조기 총선 가능성이 커진 가운데 중의원 해산에 따른 재정 불안 우려와 일본은행(BOJ) 기준금리 인상 지연 전망 등이 반영됐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란 반정부 시위 확산, 미국 행정부 '상호관세' 이슈와 연준 인선 등도 향후 환율 변동성을 키우는 이벤트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권아민 NH투자증권 연구원은 "현재 환율 상승은 대내 수급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결과로 이전 고점인 1480원 부근에서 당국의 개입 의지가 재확인될 경우 해당 레벨을 돌파할 가능성은 낮다"며 "다만 해당 레벨에서도 당국개입 의지가 후퇴될 경우 당사 올해 연간 상단은 1500원 수준으로 제시 중"이라고 했다.
'환율-증시 디커플링(탈동조화)' 현상의 이면에는 국내 외화 수급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은행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1~10월 거주자의 해외 투자 등으로 빠져나간 외화 순유출 규모는 196억 달러(약 29조 원)에 달하며 환율 상승의 직접적인 원인이 됐다. 경상수지 흑자라는 방패가 거주자의 해외 투자 수요라는 창을 막아내지 못하는 구조다.
권용오 한국은행 국제금융연구팀장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환율 흐름과 외환 수급 간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형성됐다"며 "2020년대 이전에는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해외 투자 수요보다 커 외화 초과 공급이 발생했으나, 2024년 이후에는 높은 수준의 흑자에도 불구하고 환율이 빠르게 오르는 기현상이 반복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는 수출 기업들이 환전을 지연하거나 해외 현지에 자금을 쌓아두면서 경상수지 흑자가 곧바로 국내 외환 공급으로 이어지던 연결고리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장부상 흑자는 기록되지만 실제 외환 시장에 풀리는 달러는 부족한 '수급의 괴리'가 발생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수출 기업들의 환전 기피 심리가 환율 상방 압력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더 결정적인 요인은 국민연금과 서학개미 등 거주자의 폭발적인 해외 투자 확대다. 지난해 1~10월 경상수지 흑자(896억 달러)와 외국인 국내 증권 투자 유입(319억 달러)에도 불구하고 거주자의 해외 증권 투자가 이를 압도하며 순유출을 기록했다. 거주자의 해외 증권 투자 규모는 전년 동기 710억 달러에서 1171억 달러로 무려 65%나 급증하며 달러 수요를 견인했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한국 가계의 자발적인 포트폴리오 다변화로 미국 주식을 사고 있고, 원화 가치와 주가 간 디커플링이 뚜렷해지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평가했다.
환율이 올라도 증시가 오르는 디커플링 현상은 국내 증시의 기초 체력(펀더멘털)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해진 것을 원인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코스피 상장사들의 이익 구조가 고환율 환경에서도 견조한 실적을 낼 수 있는 수출 대형주 위주로 재편되면서, 환율 상승이 오히려 기업 이익 개선의 지렛대로 작용하는 국면이다. 실제 반도체와 자동차 등 주력 산업의 글로벌 경쟁력이 강화되면서 증시는 더 이상 환율이라는 단기 변수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강한 내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진우 메리츠증권 센터장은 "최근 증시는 실적 장세에 가까우며 반도체 중심의 랠리가 증시를 강하게 이끌고 있다"며 "실적에 대한 기대감이 주가에 반영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다만, 4분기 실적 발표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작년에 실적이 많이 좋았지만 올해도 얼마큼 좋아졌을지 윤곽을 잡아보는 첫 단추이기 때문에 증시는 대내외 여건 보단 기업 고유의 업황이나 실적에 따라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