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휘은의 AI이야기] 떠 있는 바위 위에서 웃는 법

입력 2025-12-2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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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밈, 그리고 새로운 다다이즘의 탄생

▲반휘은 칼럼니스트/ AI컨설턴트. (출처=본인 제공)
▲반휘은 칼럼니스트/ AI컨설턴트. (출처=본인 제공)
대한민국은 인공지능을 포괄적으로 규율하는 국가 차원의 법률을 실제로 시행한 세계 최초의 나라가 되었다. 이 사실은 흔히 규제 선도라는 표현으로 요약된다. 기술이 통제 불가능한 인프라로 굳어지기 전에 국가가 먼저 개입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법의 중요성은 등장한 시점에도 있다. 이 규제는 하나의 문화적 순환이 정리된 뒤에 등장한 것이 아니라, 인식의 구조 자체가 아직 요동치고 있는 한가운데에 정립되었다. 인공지능은 이미 의미가 생산되고, 유통되고, 소진되는 조건 자체를 재편하고 있다. 법은 시스템의 차원에서 개입하지만, 늘 그랬듯 문화는 이미 형식의 차원에서 반응을 시작했다.

법률 발표와 비슷한 시기에 TIME지는 ‘AI의 설계자들’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며 ‘Lunch Atop a Skyscraper’ 를 본뜬 표지를 내놓았다. 1932년에 찍은 해당 작품은 뉴욕 록펠러 센터 건설 현장에서 상공 260m에 매달린 철근에 앉은 노동자들을 담고 있다. 허공 위에 앉은 그들의 맨몸은 곧 위험이었고, 그 위험 속에서 잠시 숨을 돌릴 틈을 찾아 도시락을 꺼내는 일상의 흔적이 진보의 증거이자 기술을 압도하는 인간의 힘, 산업화의 중심에서 놀라운 속도로 발전한 인류의 초인적 가치의 증거였다. TIME지가 재현한 이미지에서는 철골과 스카이라인은 남아 있지만, 실질적인 몸은 빠져 있다. AI 생태계를 이끄는 회사의 대표들의 얼굴은 철근 위에 실재하지 않는 데이터의 구상일 뿐이었다. 록펠러 센터의 벽 한 인치, 창문 한 틀까지 맨손으로 다지고 쌓았던 노동자들과 달리, 표지 속 혁신의 새로운 얼굴들은 AI의 골격과 골자에 기름때 묻은 흔적을 얹는 대신, 입구의 붉은 리본을 자른 후 밀물처럼 쏟아지는 입장료 위에서 위풍당당하게 흔들리는 깃발에 가까운 형상이다.

이런 전환점에서 예술은 언제나 싹을 움텄다. 19세기 후반, 사진 기술의 등장은 미술의 유구한 특권이었던 ‘재현’이라는 오랜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하고, 훗날 더 싸게 세계를 복제할 수 있는 기술 앞에서 회화는 패배적인 태도 대신 다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모네가 집요하게 빛의 흔들림을 붙잡았던 이유, 세잔이 사과를 끝내 하나의 유형으로 고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세계가 더 이상 단일한 관점에서 인식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 때문이었다. 이 불안과 뒤따라온 해소를 더욱 노골적으로 밀어붙인 것은 입체주의였다. 피카소와 브라크가 대상을 해체한 것은 형태를 파괴하고 싶은 욕구보단 하나의 시점이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는, 더 나아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사실을 붙잡는 대신 작가들은 이미지를 흐렸고, 색을 왜곡했으며, 대상을 해체했다. 정형화된 세상을 담아낼 기술을 따라잡지 못할 것이란 걸 간파한 예술가들은 세계를 설명하고자 했던 기존 방식 대신 설명이라는 약속 자체를 의심하며 재현의 정교화를 분해했다. 이는 반항보단 인식의 필요, 감각의 조정에 가까웠다. 이전의 형식으로는 세계를 자각하는 시선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순간, 형식은 스스로를 변모하며 인식을 변화하는 쪽을 택해왔다. 기술이 세계를 ‘정확히’ 보여주기 시작할수록, 예술은 정확함을 의심하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AI를 둘러싼 오늘의 문화적 반응 역시 같은 논리를 따른다. 미술관과 살롱 대신 피드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오늘날의 지배적인 미학은 일관성과 정돈보단 축적에 가깝다. ‘뇌썩밈’ 편집 영상, 코어코어 (#corecore) 몽타주, 6-7 밈 등은 유의미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보단 과잉 상태를 만드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논증이 아닌 포화 상태와, 날것의 자극에서 오는 정동을 통해 작동하는 것이다. 이유 없이 붙여진 이미지, 소리, 텍스트 속에는 위계나 결론이 없음에도 사람들은 댓글과 리포스트를 통해 같은 결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작품을 이해함으로써 도출되는 결론이 논의와 공감대의 재료였다면, 현재는 이해하려는 태도 자체를 내려놓는 시작 접근법으로부터 감상이 완성된다. 다다이즘의 메아리다.

세계 1차대전 이후의 혼란과 허무를 표현하기로 유명한 다다는 결코 무작위의 미학이 아니었다. 흔히 아무 말이나 하는 예술로 오해되는 해당 사조는 실제로는 20세기 초 가장 정밀한 미디어 비평으로 작동하며, 신뢰와 규칙의 위기에 대한 정밀한 대응으로 탄생했다. 합리적 담론, 관료적 질서, 선형적 인과성이 이미 기계화된 폭력과 완벽히 양립적 공존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난 뒤, 해당 운동은 우연의 숭배를 거부하며, 오히려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하던 언어 체계가 어떻게 세계대전의 학살을 정당화했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했다. 그렇기에 다다이스트들이 한 일은 의미를 파괴하는 것이 아닌, 타락하고 실패한 의미의 기존 형식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이었다. 한나 회흐와 존 하트필드의 포토몽타주는 신문, 광고, 정치 선전 등의 이미지를 맥락에서 찢어내 충돌시키며 중립성이라는 주장 속에 숨은 폭력을 드러냈다. 라울 하우스만의 ‘기계적 두상 (1919)’은 인간 주체가 이미 분해된 부품으로 전락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는 예술의 의미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대상에서 표현적 깊이를 제거함으로써 가치와 의미가 얼마나 제도와 맥락에 의해 임의적으로 부여되는지를 폭로했다. 의미의 왜곡에 대한 다다이즘 작가들의 시도는 실패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오늘날의 밈 문화는 다른 권력 조건 속에서 이 거부 의사를 계승하고 있지만, 근간에 분명한 차이를 두고 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늘을 뒤덮던 폭격이 땅에 도달해 다다이즘의 씨앗을 심었다면, 현대 불안의 징표는 가시적인 파괴와 공습이 아닌 자아의 추출에 뿌리를 둔다. 임대된 시스템을 통해 작동하는 사회에서 소유는 접근으로, 소유물은 구독으로 전환되었다. 노동은 지표, 참여도, 가시성 속으로 용해된다. 이 모든 것은 AI를 통해 가속화되고 있다. 의미가 빠르게 닳아가는 현재에서 책임 또한 흐려지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부조리는 진지함의 결여가 아닌 진지함의 고갈에 대한 반응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다. 밈이 해석을 거부하는 이유는 해석의 여지가 비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해석이라는 행위 자체가 이미 포획의 메커니즘이 되었기 때문이다. 읽힐 수 있다는 것은 곧 추출할 수 있다는 뜻이고, 추출되어 이해가 가능한 것은 곧 수익화로 귀결되는 것이 현대 문화 경제의 문법이다. 터무니없고 ‘황당’한 밈의 (비)해석 여지는 방어 기제에 가까운 것이다. 의미를 안정화하는 것은 해당 ‘작품’을 피상적인 수익화와 기계적인 확장에 최적화된 시스템에 넘기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의 밈은 고의로 멈추고, 반복하고, 끝을 망치며, 종국엔 의미가 완성되기 직전에 도망친다. 이것은 소통의 실패가 아닌 불투명하게 남기 위한 의도된 전략이자 선택이다.

알고리즘 피드의 구조는 이 논리를 더욱 강화한다. 20세기의 포토몽타주처럼 피드는 선형적 인과보단 비선형적 병치를 통해 경험을 조직한다. 포토몽타주가 신문의 지면을 가위로 잘라내 병치했다면, 오늘의 밈은 자동화된 추천 알고리즘이 잘라낸 세계의 파편을 실시간으로 재조립한다. 처절한 비극은 낯뜨거운 농담 옆에, 진솔한 고백은 시끄러운 광고 앞에, 날카로운 재난은 오직 말초적 과잉 자극을 위해 설계된 콘텐츠에 겹쳐져 놓인다. 찢어진 시간, 왜곡된 규모에서 우리는 이야기를 읽어내지 못한 채 몽타주 속으로 미끄러진다. 디지털 공간의 조각들을 꿰어붙여 비합리적인 영상을 통해 하나의 정동을 유발하는 코어코어 영상들은 이 조건을 반영하는 자기반성적 비평으로 기능하고, 논리가 결여된 뇌썩밈들이 자가발전하며 폐쇄적인 언어적 기표로 발달하는 과정은 축적을 질식할 때까지 과장함으로써 피드에 숨을 불어넣는다. 밈은 피드를 탈출하지 않고, 피드를 가시화한다. 20세기 다다이스트들이 의도적으로 충돌을 설계했다면, 현대의 밈은 충돌이 기본값이 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형식적 적응으로 볼 수 있다.

언어 역시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한때 젊은 세대의 은어는 즉각적인 번역을 거부하는 선택적 불투명성이었다. 그러나 플랫폼 문화는 이러한 특정 공동체적 의식을 무너뜨렸다. 모든 것이 검색창에 드러난 지금, 모든 맥락과 비밀스러운 언어는 세대를 막론하고 넘나들며 하나의 템플릿으로 평준화되었다. 확장된 접근성에 의미와 특별성은 옅어졌다. 이에 대한 반응은 더 깊은 비가독성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수많은 밈들은 이제 별도의 설명서 없이 정서를 발생시키는 폐쇄 회로처럼 작동한다. 의미와 맥락에 대한 공백은 단절이 아닌 경계선으로 작동하는 것이다. 러시아 형식주의가 주장한 ‘오스트라네니 (이질화)’처럼, 너무 익숙해진 기호는 더 이상 감각을 자극할 수 없기에 밈과 은어는 전달보단 전달을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즉각적인 이해가 불가능할수록 기호는 다시 공동체 내부의 리듬을 획득한다. 의미는 설명보단 반복적인 사용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떠 있는 바위 위에서 살고 있을 뿐이다”라는 문장이 자연스럽게 퍼진 것일지도 모른다. 가볍고 장난스러워 보이는 이 문장은 현재의 조건을 잔혹할 정도로 정확하게 압축한다. 허무주의적이면서도 묘하게 도취적인 이 말은 진보의 서사가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하는 현재 상태를 요약하는 동시에, 우리의 자동화된 일상이 역설적으로 얼마나 불투명해졌는지를 명명한다. 차용된 조건 위에서 의미를 믿으라는 요구에 대한 피로감. 꽤 잔인한 진단이 아이러니한 유머를 위한 하나의 펀치 라인으로 소비되는 과정까지 현재 상태를 대변하는 메타적인 비평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AI를 법으로 먼저 다루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법이 시스템을 관리하기 위한 작동 체제이듯, 문화는 경험을 의도적으로 관리 불가능한 자유의 영역으로 보존하려고 한다. 이는 전통적인 의미의 대립보단 서로 다른 분기점으로 존재하는 것에 가깝다. 규제가 다루는 것은 편향, 안전, 오남용, 투명성 등의 결과다. 반면 문화가 반응하는 것은 주체 없는 자동화, 의미 없는 접근성, 신비를 잃은 불투명성 등의 조건이다. 밈은 거버넌스가 쉽게 명명하지 못하는 것에 빛을 비춘다. 이해 가능성 자체가 사회적 선이라는 믿음에 균열이 가고 있다는 신호다.

이러한 이유로 이 순간을 새로운 다다이즘이라고 부르는 것은 미학적 수사에 그치지 않는 진단인 것이다. 시스템이 지각을 재편할 때 문화는 언제나 일관성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응답해왔다. 부조리는 진실을 말하는 형식이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허무주의적 심상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실상은 한때 권위를 주장하던 언어들이 더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선택해온 오래된 방식이다. AI의 시대에 비논리는 의미가 이동하고 있다는 증표다. 설명에서 벗어나 불투명성, 정동, 그리고 공유된 제한적 인식으로 향하는 이동. 완전히 이해되는 것이 위험해진 세계에서 혼란에서 야기된 웃음은 여전히 인간이 남겨둔 가장 오래된 저항이다.

미술사는 늘 뒤늦게 이름을 붙인다. 다다이즘 역시 그 시대에는 ‘미친 짓’에 가까웠다. 제도는 언제나 나중에 그것을 정리하고, 박제하고, 안전하게 만든다. 지금의 밈 역시 언젠가는 교과서 속 사례가 되어 한 여름 펜을 굴리는 학생들이 써내려갈 몇 줄의 사례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이 부조리한 형식들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버젓이 숨을 쉬는 감각으로 존재하고 있다. 아직 해석되지 않고, 아직 포획되지 않은 날것의 상태로.

이 각도에서 보면 지금의 디지털 표현은 문화의 일탈이 아닌 가장 또렷한 응답이다. 새롭게 떠오른 형태의 다다이즘은 스스로를 예술이라 선언하지도, 제도적 인정을 요구하지도 않으면서 정당성이 균열될 때 예술이 늘 흘러들어갔던 곳으로 이동할 뿐이다. 파편화된 그 재료는 열화된 이미지, 반복되는 소리, 부서진 문장, 완전한 이석이 해갈되지 않은 정동이다. 20세기의 다다이즘이 그랬듯, 현재의 문화는 의미가 지나치게 유창해지고, 관리 가능해지고, 가치 시스템 속으로 너무 쉽게 접히는 순간 가장 정직하게 반응하는 법은 신호를 망가뜨리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무의미로의 후퇴처럼 보이는 이 행동 양식은 오히려 의미를 형식 속으로 옮기는 작업이기에, 황당한 현재의 ‘밈’은 문화적 퇴행이 아닌 기억이라고 봐야 정확하다. 이미 말이 되지 않는 세상에서 예술이 설명할 의무를 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떠올리는 기억. 지능이 자동화되고 설명이 무한 복제되는 시대에, 이러한 부조리적 유머는 가장 오래된 특권을 되찾는다. 끝까지 인간으로 남을 권리, 읽히지 않을 권리, 조용한 균열을 퍼뜨릴 권리. ‘식스-세븐’을 외치며 웃는 이유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세상에서 갑자기 모든 것이 지나치게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저자 소개

반휘은은 글로벌 AI 거버넌스와 신기술을 전문으로 하는 정책 컨설턴트이자 저술가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디지털 인문학, 미디어철학, AI윤리를 전공하며 석사과정을 마친 후, 뉴욕 유엔본부의 (전)기술특사실 (현)디지털과 신기술사무국(전 Office of the Secretary-General’s Envoy on Technology, 현 Office for Digital and Emerging Technologies)에서 AI 정책 연구와 분석을 주도했다. 안보, 에너지, 노동, 건강, 법의 지배 등 다양한 분야에서 AI 거버넌스를 위한 전략적 프레임워크를 개발했으며 20회 이상의 고위급 자문 회의를 주관하며 AI 정책을 구체화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메타 등 주요 산업 리더들과 협력하여 AI 거버넌스의 글로벌 표준을 마련하는 데 기여한 반휘은은, 디지털 윤리와 사회적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학계와 산업계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며, 현재는 AI 거버넌스를 주제로 한 책을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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