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발언시간 사전배분 필리버스터 불가
2012년 여야 합의로 도입 13년 만에 정반대
정치권 "갈등 심화되면 소수당 권리 억압 경향”

2012년 5월 2일 국회 본회의장. 여야는 '국회선진화법'을 합의 처리했다. 2000년대 후반부터 반복된 국회 폭력을 끝내자는 취지였다. 당시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는 "더 이상 몸싸움이나 망치, 최루탄 등의 모습이 세계 TV에 나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 김진표 민주통합당 원내대표는 "국회가 시간은 좀 걸리지만 싸우지 않고 대화·타협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만든 법"이라고 평가했다.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소수당 보호를 주장했고,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이 동의했다.
13년이 지난 2025년 12월, 상황은 정반대다. 여당이 된 민주당은 필리버스터 제한법을 추진했고(범여권 반대로 보류), 야당이 된 국민의힘은 "소수당 권리 침해"라며 반발한다. 2016년 테러방지법 필리버스터 당시 192시간 동안 연단을 지켰던 민주당이, 이제는 필리버스터를 '정략적 시간 끌기'로 규정한다. 당시 "테러 막는 법을 막는다"며 민주당을 공격했던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은 이제 필리버스터를 ‘최후의 저항 수단’이라고 옹호한다.
이런 현상은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민주당과 공화당은 다수당일 때는 필리버스터 약화를, 소수당일 때는 보호를 주장해왔다. 2013년 민주당이 다수당이던 시절 연방판사 인준에 대한 필리버스터 종결 요건을 60명에서 51명으로 낮췄고, 2017년 공화당 다수당 시절 대법관 인준까지 확대했다. 정치학자 사라 바인더(Sarah Binder)는 이를 두고 '정책 갈등이 심화되면 다수당은 소수당 권리를 제한하려는 유인이 증가한다'고 분석했다.
제도 설계에서도 한국과 미국은 다르다. 9일 우원식 의장이 나경원 의원의 마이크를 차단한 근거는 국회법 제102조(의제 외 발언 금지)다. 한국은 필리버스터 중에도 의제 관련 발언만 허용된다. 반면 미국은 아무 제한이 없다. 1957년 스트롬 서먼드(Strom Thurmond) 상원의원은 민권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 24시간 18분 동안 전화번호부와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2013년 테드 크루즈(Ted Cruz) 의원은 21시간 동안 닥터 수스의 동화책 ‘초록 달걀과 햄’을 읽었다.
2025년 4월 민주당 Cory Booker 의원은 트럼프 정책에 항의하며 25시간 5분간 발언해, 1957년 스트롬 서먼드의 기록을 깨고 미 상원 역대 최장 발언 기록을 경신했다.
도입 과정도 다르다. 미국 필리버스터는 1806년 상원 규칙 개정 과정에서 '이전 질문(previous question)' 조항을 삭제하면서 의도치 않게 탄생했다. 한국은 2012년 국회 폭력 방지와 토론 장려를 목표로 명시적으로 설계됐다. 정치학자 아렌드 레이파르트(Arend Lijphart)의 분류에 따르면 한국의 필리버스터 도입은 다수결형에서 합의형 민주주의로 이동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합의형이 ‘더 자애롭고 더 온화한’ 민주주의라고 평가했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독일은 필리버스터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각 원내교섭단체의 의석 비율에 따라 발언 시간을 사전 배분하는 'Berliner Stunde(베를린 시간)'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대신 대질문권, 헌법재판소 제소권 등으로 소수당 권리를 보호한다. 프랑스는 발언 시간이 제한돼 미국식 필리버스터가 불가능하다. 대신 수정안 대량 제출로 의사방해를 한다. 2006년 가스드프랑스 민영화법안에는 무려 13만7449개 수정안이 제출됐다. 일본은 '우경전술(牛歩戦術)'이라는 독특한 방식이 있다. 기명투표 시 투표함까지 극도로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다. 1992년 PKO법안 투표에선 13시간 8분이 소요됐다.
결국 필리버스터 제도의 운명은 제도 설계보다 정치문화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012년 국회선진화법의 취지는 '대화와 타협의 정신 복원’이었다. 그러나 13년이 지난 현재, 필리버스터는 대화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12월 필리버스터 기간 중 국민의힘 의원 107명 중 55명은 지역구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텅 빈 본회의장에서의 독백이 반복됐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여야 모두 본인들이 만든 룰을 존중하며 국회 운영을 해야 하는데 극한 대결을 반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