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BM·패키징 초격차가 생존 조건… 韓, 기술·동맹·생태계 재정비 시급
중국 시장은 ‘관리형 공존’… 인력·장비·수요까지 전방위 대응 필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8일(현지시간) 꺼내 든 ‘엔비디아 H200 대중국 수출 허용’ 카드는 단순한 무역 규제 완화가 아니다. 기술이 외교의 핵심 무기가 된 ‘기정학(技政學·Techno-Geopolitics)’ 시대가 완전히 고착화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미·중 패권 경쟁의 본질은 결국 ‘반도체’로 귀결된다. 미국은 중국의 첨단 인공지능(AI) 기술 자립을 막기 위해 최상위 모델(블랙웰)은 틀어막으면서도, 한 단계 아래 모델(H200)은 비싼 ‘통행세(매출의 25%)’를 받고 열어주는 철저한 실리 전략을 택했다. 한국은 미국과 기술 협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중국 시장을 전략적으로 관리해야 하는, 어느 때보다 복잡한 균형점을 요구받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AI 경쟁의 핵심은 GPU와 이를 뒷받침하는 HBM·DDR5·AI 서버 D램 등 메모리 반도체다. 미국은 AI 초거대 모델 시대의 뒤판을 장악하기 위해 최첨단 GPU의 중국 유입을 원천 차단하면서도, 미국 기업의 매출 감소를 완충하기 위해 중간 단계의 칩은 ‘조건부 허용’으로 조정하는 투트랙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규복 한국전자기술연구원(KETI) 석좌위원은 “AI가 모든 산업의 기본 기술이 되면서 GPU·데이터센터는 사실상 안보 인프라가 됐다”며 “미국이 H200은 풀면서도 블랙웰·루빈 등 최첨단 칩을 여전히 봉쇄하는 것은 AI 패권을 중국에 쉽게 내주지 않겠다는 전략적 판단”이라고 설명했다.
중국은 반대로 화웨이 중심으로 AI GPU·통신칩 자립 속도를 끌어올리며 ‘탈미국’ 전략을 공세적으로 추진 중이다. 미·중 패권 경쟁이 장기전으로 굳어진 만큼, 한국의 외교 전략 역시 산업·기술과 연동된 형태로 재편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미국과의 기술 동맹을 강화하되, 중국 시장이 가진 사업적 가치를 고려해 ‘탈중국’이 아닌 ‘위험 분산’에 초점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AI 반도체 선도국을 중심으로 공급망 동맹을 확대하고 있다. 반도체 제조·설계·장비·패키징 전 과정에서 한국의 시스템 경쟁력을 높여 미국의 필수 파트너로 자리잡는 것이 가장 현실적 전략이라는 평가다.
반면 중국 시장은 여전히 한국 반도체 산업에 ‘필수이자 위험’을 동시에 안고 있다. 중국 반도체 굴기와 미국의 칩 통제 사이에서 한국 기업이 미국의 규제 프레임에 종속되면 단기 리스크는 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시장 축소라는 구조적 부담이 생긴다.
이 석좌위원은 “중국은 여전히 세계 최대 반도체 수요처이지만 장비 규제로 현지 공장의 미세공정 전환이 막혀 있다”며 “정부가 미국과의 협의를 통해 장비 문제를 해결하고, 기업 간 과당경쟁이 아니라 규모 있는 협력체계를 만들어 중국 시장을 전략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한국이 기술 패권 경쟁 한가운데에 선 만큼, 최우선 과제로 ‘초격차 기술력 확보’가 선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이 석좌위원은 “HBM3에서 HBM4로 넘어가는 전환기인 만큼, 메모리뿐 아니라 본딩·패키징·장비 등 후공정 기술까지 함께 끌어올려야 장기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며 “정부가 인력·공정·장비 생태계를 함께 육성하고, 신생 AI 반도체 기업과의 협력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인력 문제도 지적했다. 이 석좌위원은 “중국계 투자사와 스카우트 인력이 판교까지 들어오며 국내 핵심 인력이 빠져나가는 상황”이라며 “은퇴 연구자들이 국내에서 교육·훈련 역할을 이어갈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기술 유출과 인력 공백을 동시에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