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개관한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10만여 점의 문명 유물을 보유하고 있는 이집트 대박물관의 관람기입니다. 나일강을 품은 7천 년 문명의 비밀을 보여주고 있는 이곳에는 해외 관광객으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단순한 과거의 유물 저장소가 아니라 7천년의 문명을 소개하는 “살아있는 기업가정신의 교과서”였습니다. 이집트 대박물관은 죽은 왕들의 안식처가 아니라, 7천 년이라는 장구한 시간 동안 척박한 환경 속에서 생존과 번영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국가 경영의 유산품’이었습니다.
‘이집트 문명은 절실함이었습니다. 나일강은 재난을 자산으로 바꾼 최초의 비즈니스 모델이었습니다.’
문명은 언제나 절실함과 안이함이 갈등했고, 도전과 응전 속에서 진화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카이로에서 배우는 것은 절실함으로 도전한 기업가정신이었습니다.
‘카이로는 7천 년 문명의 출발점이자 인류 기업가정신의 요람이었습니다.’
이곳의 유물에는 자연의 폭력과 생존의 한계에 어떻게 응전하며 문명을 구축했는지가 보여지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배가 있었고, 거대한 피라미드가 있었고, 섬세한 예술품이 있었습니다. 이 문화의 뒤에는 ‘사람을 향한 정신’이 있었습니다.
파라오의 힘은 나일강 범람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사명”이었습니다. 파라오는 나일강 문명의 창조자였습니다. 그의 권력은 백성을 지키는 책임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카이로는 7천 년 이상 인류 문명을 품어왔고, 5천 년 이상 통일된 국가와 제도를 유지해 왔습니다.
첫째, 박물관에 들어서면 로비 중앙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람세스 2세의 거상이 우뚝 서 있습니다. 그는 죽은 왕의 조형물이 아니라 문명을 조직하고 3천 년 전 문명을 설계한 '문명의 CEO'의 상징이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피라미드는 단순한 돌 쌓기가 아니라 돈, 사람, 기술을 투입한 기업의 프로젝트였습니다. 나일강 수운을 이용한 거석 운반, 대규모 노동 조직, 식량 조달, 건축 기술의 표준화는 고대의 종교 의례가 아니라 국가 경영이었습니다. 그것은 수십만 노동자, 20–30년에 이르는 초장기 프로젝트, 공급망, 곡물·의복·지위의 인센티브 시스템, 건축·운송·계측·표준화를 통합한 기업 프로젝트였습니다.
이집트 7천 년의 문명은 나일강의 홍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나일강은 7,000년 동안 자연의 폭력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 그리고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을 만들어내는 절실한 기업가정신이 어떻게 응전하며 문명을 구축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둘째, 박물관에서 반드시 놓쳐서는 안 될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투탕카멘의 황금가면입니다. 투탕카멘은 10만 개의 유물 중 가장 인기가 있는, 파리 박물관의 모나리자 같은 최고 상징물이었습니다. 투탕카멘의 황금가면은 기원전 1323년경에 제작되었습니다. 즉, 지금으로부터 약 3345년 전에 만들어진 유물이었습니다. 황금가면은 당시 예술가의 작품이자 디자인이며, 그 디자인은 단순히 미적 표현이 아니라 문명을 만들어내는 능력이었습니다. 3300년 전 제작된 이 가면은 10kg 이상의 순금이 사용되었지만 핵심은 금속의 재산적 가치가 아니라 문명의 개념적 가치였습니다. 이집트는 '영원성=금'이라는 심볼 체계를 창조했으며, 이를 통해 신성성과 통치의 연속성을 시각적으로 기록했습니다. 투탕카멘의 황금가면은 장례 의식의 장식이 아니라 문명이 스스로를 어떻게 기억하고 브랜딩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습니다. 그 작품 앞에서 관람객은 금빛의 화려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3천 년의 메시지가 응축된 디자인 철학을 보게 되었습니다.
셋째, 그랜드 이집트 뮤지엄의 본 전시를 지나 별관으로 이동해 엘리베이터로 5층에 오르면, 방문객은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목제 선박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됩니다. 바로 쿠푸왕의 태양선입니다. 이 선박은 피라미드 무덤 옆 바닥 깊숙한 폐쇄된 석갱 속에 완전히 분해된 채 묻혀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약 1200여 개의 목재 조각과 3000여 개의 결속 끈, 수십 개의 노와 돛이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와 다시 맞춰진 결과가 지금의 형태였습니다. 이 배는 쿠푸왕(기원전 2580~2560)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길이 약 43.6m, 폭 5.9m, 무게 약 45톤에 달하는, 현존하는 고대 선박 가운데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걸작으로 평가됩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거대한 배가 못 하나 사용하지 않고, 오직 식물 섬유 끈만으로 목재를 엮는 결구 방식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이집트인은 강철도 못도 없이 습기·팽창·온도 변화를 견디는 유연한 구조를 선택했습니다. 쿠푸의 태양선은 물과 싸운 것이 아니라 절실함의 용기로 물을 활용해 생존한 인간의 지혜가 만든 문명의 결과물이었습니다. 피라미드를 구성한 거대한 무게 2톤에서 30톤에 이르는 석재들은 모두 나일강 수로를 따라 상류에서 하류로 이동했습니다. 5천 년 이전에 만들어진 이 배는 인간의 지혜가 어디까지인지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박물관 참관 후 나의 생각은, 그렇다면 ‘왜 어떤 문명은 성장하고 어떤 문명은 쇠퇴하는가?’에 빠져 들었습니다.
첫째, 이집트 문명의 기원에는 절실함이 있었습니다.
이집트 문명의 기원은 절실함이었습니다. 나일강의 반복되는 범람은 농토를 파괴했고 매년 재난을 예고했습니다. 그러나 범람이 끝난 뒤 남겨지는 검은 흙(케메트)은 인류 최초의 안정적 곡물 생산 시스템을 탄생시켰습니다. 자연의 폭력을 “예측 불가능한 비극”으로 이해하는 대신, 이집트인은 그것을 반복 가능한 시스템으로 변환했습니다. 위험을 피한 것이 아니라 제도화했습니다. 이 도전의 제도화가 7,000년 문명을 지탱했습니다. 문명의 반대는 야만이 아니라 안이함이었습니다. 이집트인은 매년 범람을 겪으며 생존의 절실함을 학습했고, 이 절실함을 혁신으로 바꾸었습니다. 범람을 분석해 달력을 만들었고, 이는 오늘날의 데이터 분석에 해당했습니다. 관개 시스템을 구축해 안정적 농업 생산성을 확보했고, 이는 현대의 인프라 투자였습니다. 잉여 곡물을 나누는 분배 시스템은 유통과 조세 제도로 발전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문명적 기업가정신이었습니다. 재난을 자산으로 바꾸는 사고,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시스템, 사람·자원·기술을 조직하는 능력은 개인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집단적 기업가정신의 결과였습니다. 결국 이집트 문명은 자연을 파괴의 힘이 아니라 시스템 설계의 기회로 보았습니다. 기업가정신은 영웅의 용기가 아니라 조직의 능력이었으며 개인의 모험이 아니라 제도화된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나일강이 없었다면 이집트 문명은 없었고, 나일강의 도전을 기업가정신으로 번역하지 않았다면 7천 년의 지속성 역시 불가능했습니다. 문명은 절실함에서 시작되고 제도에서 완성되며 기업가정신에서 재생됩니다. 이집트가 증명했습니다. 문명의 반대는 야만이 아니라 안이함이며 절실함을 도전으로 바꾸는 힘이 문명을 만듭니다.
둘째, 문명의 적은 안일함이었습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26개의 문명을 연구하면서 결국 국가의 흥망성쇠는 ‘도전(Challenge)’과 ‘응전(Response)’으로 시작되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토인비의 연구에서 문명과 국가의 적은 안이함(complacency)이었습니다. 국가의 몰락의 제1원인은 지도층의 안일함이었습니다. 도전하지 않고 현재를 지키려고 하는 관성(inertia)의 안일함이 흥망성쇠의 핵심이었습니다. 문명의 반대말은 안이함이었습니다. 인류는 안일하고자 할 때 역사는 후퇴했습니다. 이것을 경영전략에서는 ‘현재의 저주 / 현재 성공의 저주(curse of incumbency)’라고 부릅니다.
안일함(Complacency)의 어원을 분석해보면, ‘com’(강조 접두사: extremely) + ‘placere’(기쁘게 하다, please)의 복합어입니다. 즉 Complacency=현재를 극도로 즐기는 상태(pleasing extremely)였습니다. 휴브리스(오만), 마약과 같은 상태였습니다. 마약과 같은 안이한 상태에서는 절실하지 않았습니다. 안일함은 기득권의 교만에서 나왔습니다. 안일함은 그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변화를 무시하고 도전하지 않는 상태였습니다. 도전이 없었던 민족이나 문명도 무사안일에 빠져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도전이 사라지면 문명도 사라졌습니다. 결국 안일함은 인류 문명의 가장 치명적인 독이었습니다. 그것은 관성이었습니다. 고통의 반대말은 안일함이었습니다. 그것은 혁신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두 번 놀라는 이집트의 문명의 역설을 마주했습니다.
첫 번째 놀람은 절실함이 만든 기업가정신의 위대함입니다. 절실함이 인간혁신의 무한한 능력을 어떻게 끌어올리는지를 목격하는 충격이었습니다. 기자의 피라미드는 우리의 단군신화보다 앞선, 인류 최초의 거대한 메가 인프라 프로젝트였습니다. 거대한 배, 피라미드, 룩소르, 그리고 투탕카멘 황금가면이 바로 그 증거였습니다. 이것이 토인비가 말한 도전과 응전의 문명 원리였습니다. 자연의 무자비한 공격 앞에서 드러난 인간의 절실함, 절실함을 기회로 전환하는 능력, 바로 그것이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두 번째 놀람은 안일함이 만든 몰락의 깊이였습니다. 안일함은 기득권을 만들었고 기득권은 관료주의를 낳았습니다. 거대한 문명을 만든 후대는 그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오늘의 이집트는 비효율, 행정 지체, 구조적 빈곤의 악순환 속에 있으며 제도적 관성이 가장 강한 국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집트는 7천 년의 문명을 절실함에서 탄생시켰지만 기득권은 안일함을 선택했고, 그 결과가 오늘날의 안타까운 이집트였습니다. 이것이 문명의 역설이었습니다.
세상은 '어떻게 위대한 것을 만들었는가'와 '왜 다시는 만들지 못하는가'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한쪽은 생존을 위한 절실함이고, 다른 한쪽은 성공을 지키려는 안이함의 결과였습니다. 역사는 위대한 것을 만든 절실함에 의해 전진하고, 그 절실함을 잃는 순간 뒤로 미끄러집니다. 문명의 반대말은 야만이 아니라 안일함과 기득권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은 피크 코리아 앞에서 앞으로 얼마나 더 추락할 것인지에 대한 우려가 많았습니다. 성장의 절벽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핵심 문제는 '문제가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문제를 바라보는 절실함이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잘 먹고 잘 사는' 순간부터 혁신은 멈추고 제도는 스스로의 혁신의 감옥을 만들었습니다. 문명이 쇠퇴하는 것은 화려함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절실함이 사라질 때였습니다.
기업이 죽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위기 때문이 아니라 위기를 느끼지 않는 순간부터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절실함에서 도전의 기업가정신으로 앞에 서 있는가, 아니면 안일함을 추구하며 누워 있는가? 기업가정신은 어려움을 안일함으로 대응하지 않고, 절실함으로 도전하는 정신입니다. 이것이 사람중심 K기업가정신입니다. 2026년 한국이 안일함의 피크 코리아를 이야기하는 대신, 절실함의 K기업가정신으로 다시 일어서는 피봇 코리아의 해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저자 소개
김기찬 교수는 현재 인도네시아 프레지던트대학교의 국제총장이자, aSSIST 석좌교수, 가톨릭대학교 경영학부 명예교수이며, 세계중소기업학회(ICSB) 회장으로 활동 중인 대한민국 대표 경영학자다. 기업가정신과 ESG(환경·사회·지배구조)를 통합한 사람중심 경영 철학의 선구자이자, K-Entrepreneurship의 세계화를 이끄는 학계·실무계의 권위자다.
서울대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도쿄대 경제학부 객원연구원, MIT 국제자동차프로그램(IMVP) 연구위원, 조지워싱턴대학 초빙교수 등을 역임했다. 대통령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혁신경제분과 위원장, 유엔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 이사, 신남방정책 민간자문위원을 역임하며 정부 자문 역할도 수행했다.
또한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포스코에너지 등 대기업의 자문교수 및 현대모비스·홈앤쇼핑·킨텍스 사외이사 등 산업계와 학계를 연결하는 산학연 허브형 리더로 평가받는다. 윤경ESG포럼 공동대표, 한국인도네시아경영학회 회장으로서 아세안과의 경영교육 및 교류 확대에도 힘쓰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사람중심 기업가정신'(2018), '이토록 신나는 혁신이라니'(2019), '플랫폼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2015) 등이 있다. 다수의 국내외 수상 경력도 보유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