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럿에 갇힌 금융AI… 규제 개선 시급
기술은 질주하는데 제도는 따라가지 못해

은행권이 인공지능(AI) 기반 서비스 확산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개인정보 결합 제한과 망분리, 까다로운 내부 승인 절차가 여전히 발목을 잡고 있다. 금융당국이 AI 통합 가이드라인을 준비하고, 규제 개선에도 나서고 있으나 현장에서 체감하는 효과는 여전히 미미하다는 지적이다. AI 기술은 눈부시게 발달하는데 규제 개선 속도가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13일 금융권에 따르면 주요 금융사는 내부 보고서 자동화, 이상거래탐지(FDS) 고도화, 개인화 추천 모델, 상담 자동화 등 다양한 AI 기반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상당수는 ‘파일럿’ 단계에 머물러 있다. 새로운 서비스를 설계하더라도 데이터 활용 범위가 제한되고 승인 절차가 길어 실제 상용화까지 걸리는 시간이 예상보다 훨씬 길어지기 때문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데이터 규제다. 금융권에선 생성형 AI를 활용해도 현재로썬 가명 정보만 처리할 수 있어 서비스 다양성이 제한되며, 금융 데이터와 외부 데이터를 결합하려면 정보주체 재동의와 비식별화 요건 등 다단계 절차를 충족해야 한다는 불만이 나온다. 복잡한 절차 탓에 실무에서는 적용 단계마다 해석상의 혼선도 발생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소비자 보호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데이터 활용 기준이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불명확해 현장에서는 기술 도입보다 ‘가능 여부부터 확인’하는 데 시간이 더 든다”고 말했다.
AI 활용 범위가 넓어질수록 부담은 더 커진다. 특히 은행권의 핵심 업무인 대출 심사는 상담·본인확인·신용평가·담보평가 등 여러 절차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 전 단계에 AI를 적용할 경우 각각의 절차별 규제 기준을 따로 충족해야 한다. 은행권 관계자는 “담보대출 심사까지 AI가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크다”며 “기술 자체는 준비돼 있지만 책임 구조나 검증 절차가 정교하게 마련돼 있지 않아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망분리와 내부통제 절차도 혁신 속도를 늦추는 요인이다. AI 모델을 처음 실험하거나 학습하려면 본부 보안심사와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하고, 오픈소스 반입도 사전 협의가 필수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초기 개발과 테스트 단계부터 속도가 제한될 수밖에 없다. 한 은행 디지털 담당자는 “AI 모델 하나 실험하려고 해도 수개월이 걸린다”며 “기술 트렌드는 변화 속도가 빠른데 승인 절차가 길면 혁신 주도권을 잃을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여기에 혁신금융서비스 제도 운영 과정에서의 한계도 걸림돌로 지적된다. 금융권은 망분리 규제 개선으로 생성형 AI, SaaS 등 AX(AI Transformation)에 필요한 기술을 실험할 수 있게 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기존에 지정된 서비스의 기능을 일부 개선하려 할 경우, ‘부가 조건 변경 요청 제도’가 초기 신청 내용과 동일성 범위 내에서만 제한적으로 허용돼 근본적인 기능 개선은 다시 신규 신청 절차를 밟아야 한다. 금융권에서는 “기존 지정 서비스의 개선·확장에 대해 변경 절차를 간소화하거나 필요한 경우 소급 적용이 가능하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요구도 나오고 있다.
금융권에선 규제 환경을 손보지 않으면 AI 도입이 파일럿 수준을 넘어서기 어렵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해 금융위원회의 망 분리 완화 로드맵, 올해 이재명 대통령의 ‘AI 산업에 한해 금산분리 완화 검토’ 발언도 같은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은행권은 소비자 보호와 금융 안정성을 전제로 하되 최소한의 실험 공간과 예측 가능한 규제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나치게 포괄적이거나 불명확한 기준은 기술 적용을 위축시키는 부작용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책임성과 윤리를 확보하되 혁신을 위축시키지 않는 균형 잡힌 규제 체계가 필요하다"며 "금융 AI는 이미 고객상담, 이상거래탐지, 신용평가 등 핵심업무에 도입되고 있는 만큼 선제적인 규제 샌드박스나 가이드라인 명문화를 통해 예측 가능한 환경이 조성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