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을 하루 앞두고 한국과 미국이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방식을 놓고 막판 수싸움에 들어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문제없다”며 낙관적 입장을 보였지만, 이재명 대통령은 “조율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한국은 기업이 주도하는 ‘EU형 민간 투자 모델’, 미국은 정부가 직접 자금을 투입하는 ‘일본식 정부 투자 모델’을 선호하면서 셈법이 엇갈렸다.
속도에서도 차이가 크다. 미국은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협상을 마무리하려 하지만, 한국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익이 우선”이라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정상 간 ‘톱다운’ 타결 가능성이 남아 있지만, 양국의 외교·통상 셈법이 맞물리지 않으면 이번 회담은 절반의 합의로 끝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28일 대통령실에 따르면 전날 밤 귀국한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공식 외부 일정 없이 주요 참모진으로부터 APEC 정상회의 준비 상황과 주요 국정 현안을 보고받을 예정이다.
특히 29일 예정된 트럼프 대통령과의 양자회담을 앞두고 관세 협상 변수를 세밀히 점검하며 회담 전략을 가다듬는 데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관건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펀드 문제를 어떻게 풀어낼지다.
현재 양측의 입장은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이 대통령은 26일(현지시각) 공개된 블룸버그통신 인터뷰에서 한미 통상 협상과 관련해 “주요 내용에 대한 양국 간 논의는 아직 교착 상태다. 투자 방식과 금액, 시간표, 우리가 어떻게 손실을 공유하고 배당을 나눌지 이 모든 게 여전히 쟁점”이라고 말한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에서 말레이시아로 향하는 전용기에서 진행한 간담회에서 “(한·미 통상 협상) 타결이 매우 가깝다. 그들이 준비가 된다면, 나는 준비가 됐다”며 낙관적인 입장을 밝혔다.
이처럼 양측의 입장이 엇갈리는 것은 투자 방식에 대한 인식 차이 때문이다. 미국은 당초 전액 선불 현금 요구에서 일부 양보했지만 여전히 정부가 직접 자금을 투입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이는 일본이 채택한 모델과 유사하다.
일본은 특수목적법인(SPV)을 통해 대규모 현금을 한꺼번에 투입하고, 그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관세율 인하를 받아내는 ‘현금 맞교환식 투자 방식’을 택했다. 미국은 이 방식을 ‘가장 확실한 투자 약속’으로 보고 한국에도 같은 형태를 요구하고 있다. 반면 한국 정부는 민간이 중심이 되는 상업적 구조가 국익에 부합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이 대통령은 블룸버그 인터뷰에서 구체적으로 EU 사례를 언급했다. 그는 “한국은 한국의 사정을 감안해 합리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며 “일본도 하나의 준거가 될 수 있지만, 유럽과 미국의 협상이 또 준거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EU 사례를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EU 모델의 핵심은 민간 기업 주도 투자다. 민간 기업이 투자하고 EU는 금융 지원을 제공하는 구조로, 투자 주체가 민간이기 때문에 상업적 타당성과 수익성이 전제돼야 한다. 이재명 정부가 강조하는 ‘상업적 합리성’도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
문제는 협상 시계가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자국 중심의 관세 협상들을 일괄 정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한국에 대한 압박 수위도 높아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재명 정부로서는 실무 협상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상 간 회담이 사실상 최종 결정 무대에 오르는 셈이다. 이에 따라 여러 시나리오가 거론된다. 막판 정상 간 ‘톱다운’ 방식으로 난관을 돌파할 가능성도 있다. 실무진 간 이견이 좁혀지지 않더라도, 두 정상이 직접 만나 투자 원칙이나 기본 틀에 합의하는 방식으로 일단락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이는 최상의 결과다.
협상이 완전히 타결되지 않을 경우도 있다. 이때는 1차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안보 딜’만 별도로 발표하는 절충안이 유력하다. ‘노딜(No Deal)’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협상이 끝내 교착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면 별도 합의문 없이 회담이 종료될 수도 있다. 이 경우 외교적 부담과 시장 불확실성이 동시에 커질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대통령실은 "우리 정부는 일관되게 국익 최우선을 원칙으로 다양한 시나리오 안에 협상단이 신중을 기해 협상에 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