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30일 부산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의 파트너는 퇴임을 앞둔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였다. 일본 자민당은 이달 4일 새 총재를 뽑고, 14일 임시국회에서 차기 총리를 지명한다. 다시 말해 이시바 총리와의 이번 회담은 ‘현직 총리로서 마지막 해외 순방’이자, 정치 일정상 얼마 지나지 않아 역사 속 장면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퇴임을 앞둔 총리를 굳이 만나야 하느냐"는 곱지 않은 시선도 보낸다. 곧 자리를 떠날 지도자와 나눈 논의가 차기 정권에서 이어질지는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일본 정치에서 총리 교체가 잦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단발성 이벤트’에 그칠 것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그러나 이번 회담의 상징성을 단순히 ‘마지막 권력’으로 한정해선 안 된다. 오히려 양국 관계의 연속성을 확인하고 차기 정권으로까지 이어지는 협력의 고리로 해석할 때 의미가 분명해진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이 "퇴임 후에도 한·일 관계 발전에 적극적 역할을 해줄 것을 협의하는 자리”였다는 설명은 그런 맥락을 잘 보여준다. 이시바는 단순히 물러나는 권력이 아니다. 여전히 일본 정계의 대표적 중진이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다. 한국 정부가 이번 회담을 미래 지향적 협력의 다리로 활용하려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 일본 현지 언론에서도 이번 회담을 “한일 관계를 미래 지향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방침을 재확인하고, 차기 정권으로 이어가고자 하는 생각”을 강조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 역시 “전략 환경이 엄중한 상황에서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은 양국 관계의 더 큰 진전을 논의하는 중요한 기회”라고 평가했다. 퇴임을 앞둔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에서도 이번 회담을 ‘형식적 만남’으로 보지 않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회담의 의제 역시 단순하지 않았다. 양 정상은 ‘한일 공통 사회문제 협의체’ 운용 원칙을 구체화하며 저출산·고령화, 국토 균형 발전, 농업, 방재, 자살 대책 등 두 나라가 함께 겪고 있는 구조적 문제를 공동 대응 과제로 설정했다. 그간 한·일 협력이 주로 경제·안보에 집중돼 왔다면, 이번에는 양국 국민의 일상과 직결된 사회적 의제로 협력의 폭을 넓힌 것이다. 이 역시 퇴임 총리와의 형식적 회담으로 치부하기 어렵게 만드는 대목이다.
회담 장소가 부산이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일본 총리가 서울이 아닌 지방을 찾아 정상회담을 가진 것은 2004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이후 21년 만이다. 이 대통령과 이시바 총리는 ‘수도권 집중 문제’와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공통 과제를 언급하며, 지방에서 만난 의미를 부각했다. 지역 균형이라는 화두를 외교 무대에서도 공유했다는 점이 상징적이다.
결국 이번 회담은 양국 관계의 연속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모색한 자리였다. 동북아 안보 환경은 급변하고 있고, 미·중 전략 경쟁은 더욱 거세다. 한국과 일본이 과거의 감정이나 정권 교체 주기에 매몰되지 않고, 협력의 흐름을 이어가려는 노력은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
정권은 바뀌어도 과제는 남는다. 일본은 초고령 사회의 경험을, 한국은 세계 최저 출산율이라는 현실을 안고 있다. 에너지 자급률 문제, 농촌 공동화, 기후 위기 대응 역시 두 나라가 피할 수 없는 도전이다. 이러한 과제를 협력의 장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이번 협의체의 목표다. 차기 일본 총리가 누가 되든, 이시바 총리와의 마지막 회담에서 확인된 이 틀은 ‘미래 지향적 한일관계’의 최소한의 안전핀 역할을 할 수 있다.
외교는 순간을 넘어 '축적의 산물'이다. 부산에서의 만남이 단지 ‘퇴임 총리와의 마지막 만남’으로 기록될지, 아니면 ‘관계를 이어가는 첫 단추’로 남을지는 앞으로 양국 정치 지도자들의 몫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한국 정부가 퇴임을 앞둔 총리와의 회담을 통해서도 관계의 연속성을 설계하려 했다는 점 자체가 셔틀외교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