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창] 조선의 페미니스트 ‘허난설헌·이옥봉’

입력 2025-09-04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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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성 서예가ㆍ한국미협 캘리그라피 분과위원장

조선시대 여성에게 글과 시는 쉽지 않은 영역이었다. 집안과 사회는 여성의 학문적 성취를 대놓고 인정하지 않았고, 글을 쓰는 일은 오히려 ‘여자답지 못하다’는 시선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하지만 그런 제약 속에서도 붓을 들고, 자신만의 목소리를 남긴 여성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허난설헌과 이옥봉이다.

허난설헌(1563~1589)은 스물일곱에 요절했지만, 그녀의 시는 중국에까지 전해졌다. ‘규한(閨恨)’ 속 ‘요슬일탄인불견(瑤瑟一彈人不見·비파를 타도 그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사진>이라는 구절은 단순한 연정의 토로가 아니다. 규방에 갇힌 여성이 자신의 외로움과 무력함을 직시하는 순간이며, 닫힌 현실을 응시하는 날카로운 자각이다.

왕족 서녀로 전해지는 이옥봉(16세기 활동)의 ‘몽(夢)’은 사랑과 그리움의 노래이자, 동시에 여성적 처지의 절망을 담아낸 작품이다. “약사몽혼행유적/문전석로반성사(若使夢魂行有跡/門前石路半成沙 (만약 꿈속의 넋이라도 다녀간 흔적이 있다면, 문앞의 돌길이 반은 모래가 되었을 것이다)”라는 구절은 끝없는 기다림의 모습을 그린다.

시를 썼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버림받았다는 일설은 그녀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그러나 바로 그 글쓰기로 인해 이름은 후대에 남았고, 현실의 굴레 속에서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선택은, 조선 여성 문학사의 귀중한 성취로 남아 있다.

허난설헌과 이옥봉, 두 사람의 시에는 공통된 정서가 있으니 바로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제한된 삶, 그리고 그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자아의식이다.

이는 오늘날의 언어로 말하면 ‘페미니즘적 현실 자각’이다.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은 근대 이후의 것이지만 여성의 목소리가 배제된 시대에도, 그들은 시로써 자신의 정체성과 감정을 기록했고 자기 한계를 의식하면서도, 지적 성취를 통해 그 너머를 꿈꾸었던 것이다.

오늘의 여성들은 더 이상 규방에 갇혀 있지 않다. 학문과 사회 참여의 기회는 넓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유리천장, 경력 단절, 돌봄의 이중 부담 같은 장벽은 존재한다. 허난설헌과 이옥봉이 느낀 억압과 고독은 다른 형태로 현대 여성들의 삶 속에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시는 지금도 살아 있는 목소리이며, 동시에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의지를 북돋운다.

우리는 이제 규방의 한을 단순히 옛 연정의 노래로 읽지 않는다. 시대가 허락하지 않았던 목소리일지라도, 쓰여진 순간 이미 역사의 일부가 되며, 규방의 슬픔과 눈물이 오늘날 여성 문학사의 성취와 여성들의 연대로 변주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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