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사주 처리해달라는 기업 때문에 머리가 아파요. 작년에 (사전 조치를 해야 한다고) 얘기할 때는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증권사 지점에서 법인 영업을 하는 프라이빗뱅커(PB)의 하소연이다. 올해 6월 출범한 새 정부가 자사주 소각 의무화를 추진하면서 자사주 보유 기업들의 발등에 불똥이 떨어졌다. 여당이 관련 법안 여러 개를 발의했고, 이 법안들은 다음달 정기국회에서 논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김남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신규·기존 자사주 모두를 1년 이내 소각하도록 하는 안을 냈다. 김현정 의원은 기존 보유 자사주는 6개월 이내에, 신규 자사주는 취득 즉시 소각하도록 했다. 민병덕 의원은 신규 취득 자사주를 1년 이내 소각하되, 발행주식 총수의 3% 미만인 경우 2년까지 소각을 유예해 주는 안을 발의했다.
자사주는 최대주주의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활용됐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지만, 특정 상황에서 우호 세력에 매각해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활용됐다. 기업들은 자사주 소각 법안 통과 이후에도 자사주를 우호 지분으로 활용하려는 여러 우회로를 모색하고 있다.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교환사채(EB) 발행과 지분 맞교환(에쿼니 스와프)이다.
태광산업은 올해 6월 3186억 원어치의 EB를 발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발행 상대방을 기재하지 않으면서 정정 명령을 받았고, 이후 백기사로 한국투자증권을 섭외했다. 하지만 행동주의 펀드인 트러스톤자산운용이 법원에 EB 발행 금지 가처분을 내면서 EB 발행은 무기한 연기됐다. 그 전에 자사주 소각 법안이 통과되면 사실상 무산된 것이나 다름없다. EB는 시장에 신주가 나오지 않는 자금 조달 방식으로, 지분 희석에 대한 우려는 없다. 그런데도 주주들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하면 EB 발행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세방은 하이비젼시스템과 자사주를 서로 맞교환했다. 명분은 전략적 파트너십이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자사주를 서로 맞교환하면서 우호 주주를 확보한 것으로 본다.
다음 달 또는 연내 정기국회에서 자사주 의무 소각 법안이 통과되면 기업들은 즉시 또는 기한 내에 자사주를 소각해야 하는 상황에 부닥친다. 법안 통과가 지연되더라도 국내 주식시장에서 주주환원을 외치는 행동주의펀드가 많아지고, 소액주주들도 똑똑해지면서 쉽사리 자사주를 활용하기 어려워졌다. 더는 자사주를 활용한 경영권 강화 '꼼수'는 통하지 않는 상황이 된 셈이다. 최대주주들도 지분 지키기보다 본질적인 기업가치 제고(밸류업)를 통한 경영권 강화에 집중해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