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 협상의 지렛대, ‘슈퍼 을’ 조선 [데스크 시각]

입력 2025-08-05 08:07

  • 가장작게

  • 작게

  • 기본

  • 크게

  • 가장크게

반도체 장비회사 중에 ‘ASML’이라는 기업이 있다. 네덜란드에 본사를 둔 기업으로, 첨단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생산하는 세계 유일의 기업이다. ASML 장비가 없으면 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수 없다. 그냥 세계 최고의 반도체 제조업체인 삼성전자, TSMC, 인텔 등 장비를 납품하는 ‘슈퍼 을’이다. 기술 우위를 가진 기업의 경쟁력을 대표하는 사례다.

이번 한미 관세 협상에서도 이런 역할을 한 산업이 바로 조선 산업이다. ‘슈퍼 을’까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협상에서 조선 산업이 행사한 영향력은 한국 경제가 향후 지향해야 할 전략산업 육성의 중요성을 명확히 보여줬다.

올해 1월 기준 한국 조선업계는 전 세계 전체 선박 수주량의 62%를 차지하며 1위를 기록했다. 수치로만 보면 2위인 중국의 19%보다 3배 이상 우위를 점한다.

이런 경쟁력은 실제 협상 실무에서도 큰 효과를 발휘했다. 한미 관세 협상에서 ‘마스가(MASGA) 프로젝트’로 명명된 대규모 한미 조선산업 협력이 성사되면서, 관세 문제 해결뿐 아니라 미국 내 신규 조선소 건립, 조선인력 양성, 유지보수까지 포괄하는 약 208조 원(1500억 달러) 규모의 공동 펀드 조성에 합의했다. 이는 미국이 해군 전력과 상선 건조에 있어 한국의 기술력과 공급망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한 결과다. 미국은 이미 선박 건조 능력이 연간 5척 수준까지 감소했지만, 중국은 연간 70%에 달하는 신규 선박 수주 점유율을 자랑하고 있다. 결국, 미국으로선 한국 조선업과 손잡는 것이 중국을 견제할 전략적 해법이었다.

이와 유사한 선례를 보면, 반도체 산업도 한국이 협상장 밖에서 발휘한 강력한 지렛대였다. 2021년 기준, 이차전지·반도체 등 첨단 산업에서 한국은 세계 시장점유율 20% 이상, 기술 수준은 95% 이상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경쟁력을 인정받았다. 이번 관세 협상에서도 반도체에 최혜국 대우를 약속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미·중 무역 전쟁 구도에서 반도체 공급망 협상을 유리하게 이끈 주인공 역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의 세계적 기업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교훈은 한 나라의 협상력은 단순히 경제 규모나 국토 면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규모 있는 전략 산업 하나가 외교·통상 안보 등 다양한 무대에서 국가를 ‘불가결한 파트너’로 만들어준다. 조선산업이 그랬고, 반도체가 그랬듯이, 앞으로는 차세대 배터리·우주항공·인공지능·수소산업 등 정부가 전략기술로 지정한 첨단 분야에서도 같은 전략적 효과를 노려볼 수 있다.

수출 중심의 작은 개방경제는 거대한 경제권과 마주칠 때마다 ‘규모의 열위’라는 숙명을 가진다. 그러나 압도적 기술력과 높은 글로벌 점유율, 그리고 대체불가의 산업생태계를 조성하면, 그 숙명조차 뒤집는 협상력이 생긴다. 조선산업에서 확인된 바로 이 생존의 길은 변화하는 미래에도 유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비교우위의 절대적 영향력을 가진 산업을 갖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 긴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 단순 시장 크기를 쫓기보다, 글로벌 밸류체인에서 꼭 필요한 부품·기술을 장악하고 기술장벽을 높이며, 정부·민간·산학이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한다. 몇 년 뒤가 아닌 10년, 20년 뒤 우리가 주도권을 거머쥘 차세대 전략산업을 발굴하고, 육성해야 한다. 그래야만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 ‘작지만 강한 나라’로서의 생존전략이 완성될 수 있다.

조선산업이 관세 협상 테이블에서 이를 증명했다. 결정적인 한 방이 될 전략적 산업에 대한 고민과 준비가 필요하다. 물론 답에 대한 확신은 없다. 그나마 가장 근접한 답은 산업 현장이 제일 잘 알고 있고, 그 현장의 목소리는 자유로운 기업 환경에서 가장 정확하게 나온다.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 뉴스

  • 쯔양·닥터프렌즈·닥터딩요와 함께하는 국내 최초 계란 축제 '에그테크코리아 2025' 개최
  • 세계는 기업 감세 혈안…한국만 거꾸로 [역주행 코리아]
  • “길게 맡기면 손해”…장단기 정기예금, 금리 역전 고착화
  • [AI 코인패밀리 만평] 묻고 '세 배'로 가!
  • 뻥 뚫린 내부통제, ‘정보유출 포비아’ 키웠다 [무너지는 보안 방파제]
  • 50만원 호텔 케이크 vs 6만원대 패딩...상권도 양극화 뚜렷[두 얼굴의 연말 물가]
  • 지방선거 이기는 힘은 결국 ‘민생’ [권력의 계절③]
  • 삼성전자, 사업 ‘옥석 고르기’ 본격화… M&A도 시동거나
  • 오늘의 상승종목

  • 12.05 장종료

실시간 암호화폐 시세

  • 종목
  • 현재가(원)
  • 변동률
    • 비트코인
    • 135,075,000
    • +1.16%
    • 이더리움
    • 4,578,000
    • +0.66%
    • 비트코인 캐시
    • 895,000
    • +2.52%
    • 리플
    • 3,057
    • +0.56%
    • 솔라나
    • 197,400
    • -0.25%
    • 에이다
    • 624
    • +0.65%
    • 트론
    • 428
    • -0.47%
    • 스텔라루멘
    • 354
    • -1.39%
    • 비트코인에스브이
    • 30,150
    • -0.63%
    • 체인링크
    • 20,440
    • -1.87%
    • 샌드박스
    • 209
    • -2.34%
* 24시간 변동률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