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한미 관세 협상에서도 이런 역할을 한 산업이 바로 조선 산업이다. ‘슈퍼 을’까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협상에서 조선 산업이 행사한 영향력은 한국 경제가 향후 지향해야 할 전략산업 육성의 중요성을 명확히 보여줬다.
올해 1월 기준 한국 조선업계는 전 세계 전체 선박 수주량의 62%를 차지하며 1위를 기록했다. 수치로만 보면 2위인 중국의 19%보다 3배 이상 우위를 점한다.
이런 경쟁력은 실제 협상 실무에서도 큰 효과를 발휘했다. 한미 관세 협상에서 ‘마스가(MASGA) 프로젝트’로 명명된 대규모 한미 조선산업 협력이 성사되면서, 관세 문제 해결뿐 아니라 미국 내 신규 조선소 건립, 조선인력 양성, 유지보수까지 포괄하는 약 208조 원(1500억 달러) 규모의 공동 펀드 조성에 합의했다. 이는 미국이 해군 전력과 상선 건조에 있어 한국의 기술력과 공급망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한 결과다. 미국은 이미 선박 건조 능력이 연간 5척 수준까지 감소했지만, 중국은 연간 70%에 달하는 신규 선박 수주 점유율을 자랑하고 있다. 결국, 미국으로선 한국 조선업과 손잡는 것이 중국을 견제할 전략적 해법이었다.
이와 유사한 선례를 보면, 반도체 산업도 한국이 협상장 밖에서 발휘한 강력한 지렛대였다. 2021년 기준, 이차전지·반도체 등 첨단 산업에서 한국은 세계 시장점유율 20% 이상, 기술 수준은 95% 이상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경쟁력을 인정받았다. 이번 관세 협상에서도 반도체에 최혜국 대우를 약속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미·중 무역 전쟁 구도에서 반도체 공급망 협상을 유리하게 이끈 주인공 역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한국의 세계적 기업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교훈은 한 나라의 협상력은 단순히 경제 규모나 국토 면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규모 있는 전략 산업 하나가 외교·통상 안보 등 다양한 무대에서 국가를 ‘불가결한 파트너’로 만들어준다. 조선산업이 그랬고, 반도체가 그랬듯이, 앞으로는 차세대 배터리·우주항공·인공지능·수소산업 등 정부가 전략기술로 지정한 첨단 분야에서도 같은 전략적 효과를 노려볼 수 있다.
수출 중심의 작은 개방경제는 거대한 경제권과 마주칠 때마다 ‘규모의 열위’라는 숙명을 가진다. 그러나 압도적 기술력과 높은 글로벌 점유율, 그리고 대체불가의 산업생태계를 조성하면, 그 숙명조차 뒤집는 협상력이 생긴다. 조선산업에서 확인된 바로 이 생존의 길은 변화하는 미래에도 유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비교우위의 절대적 영향력을 가진 산업을 갖기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 긴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 단순 시장 크기를 쫓기보다, 글로벌 밸류체인에서 꼭 필요한 부품·기술을 장악하고 기술장벽을 높이며, 정부·민간·산학이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한다. 몇 년 뒤가 아닌 10년, 20년 뒤 우리가 주도권을 거머쥘 차세대 전략산업을 발굴하고, 육성해야 한다. 그래야만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 ‘작지만 강한 나라’로서의 생존전략이 완성될 수 있다.
조선산업이 관세 협상 테이블에서 이를 증명했다. 결정적인 한 방이 될 전략적 산업에 대한 고민과 준비가 필요하다. 물론 답에 대한 확신은 없다. 그나마 가장 근접한 답은 산업 현장이 제일 잘 알고 있고, 그 현장의 목소리는 자유로운 기업 환경에서 가장 정확하게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