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조에서 정비로, 제작에서 유지로"
부산 조선산업이 또 한 번 방향타를 꺾는다. 함정(艦艇)의 유지·보수·정비(MRO) 시장이 차세대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떠오르면서, 기존의 선박 건조 중심 구조에서 ‘정비 클러스터’ 기반의 산업 전환이 본격화되고 있다.
HJ중공업은 22일 부산 영도조선소에서 지역 조선기자재 업체들과 '함정 MRO 클러스터 협의체'를 출범시켰다. 협약식에는 인터내셔널마린, 오리엔트조선 등 부산·경남 지역 중소 조선기술 기업 10곳이 참여했다. 이들은 앞으로 기술과 설비, 인력 자원을 공유하며 함정 정비 입찰과 사업 수행 전반에서 공동 대응할 계획이다.
HJ중공업 관계자는 "조선산업을 떠받치던 기자재 기업들이 수주 편중과 경기변동으로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협의체는 중소기업에게 '지속가능한 생존 로드맵'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 따르면 최근 약 20조 원 규모의 미 해군 함정 정비시장(MRO)이 열리면서, 국내 방산 조선업체들도 적극적인 진출을 시도 중이다. 특히 HJ중공업은 현재 미 해군과의 MRSA(Master Repair Ship Agreement) 체결을 추진 중이며, 성사될 경우 국내 정비 역량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신호탄이 될 전망이다.
HJ중공업은 1974년 국내 최초의 해양방위산업체로 지정된 이후 50년 가까이 해군 함정 건조와 정비사업을 병행해온 업체다.
그동안 1,200여 척의 함정·군수지원체계를 운영하며 '국내 함정 생애주기 산업'을 주도해왔다.
이러한 기술력에 기반해 이번 MRO 클러스터는 단순 기술 협약을 넘어, 부산·경남 조선 생태계 전반의 업그레이드 전환점이 될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조선업계 한 관계자는 "건조는 대기업 중심 구조로 고착화됐지만, MRO는 중소 전문기업들이 역량을 발휘할 여지가 많다"며 "지역 내 기술기업들이 네트워크를 이루고 해외 수요에 공동 대응하는 구조가 형성된다면 새로운 블루오션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부산·경남은 조선기술 생태계가 국내에서 가장 밀집된 지역이다. 선체 블록 제작에서 배관, 전선, 철 구조물까지 수백 개의 중소 기자재기업들이 영도, 사하, 진해 등에 분포해 있다. 그러나 조선 경기의 변동성과 대형조선소의 수직통합 구조 속에서 기술력은 있으나 판로를 확보하지 못하는 기업들이 늘어나는 상황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 협의체는 기업 간의 기술 분업과 공동 입찰 전략을 제도화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유상철 HJ중공업 대표이사는 "MRO 시장의 성장성에 주목해 지역 기업들과 선제적으로 협력 체계를 구축했다"며 "이번 협약을 통해 동반성장 기반을 다지고, 글로벌 정비 시장에 부산 기업이 공동 진출하는 모델을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