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모채 시장 문턱이 높아지자 석유화학, 건설업체들이 사모 회사채(사모채)로 눈을 돌리고 있다. 수요예측 주문에 어려움을 겪고 금리 부담도 높은 공모채 대신, 비교적 발행이 용이한 사모채를 통해 유동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다.
10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30일 쌍용건설은 1년 만기 사모채를 6% 후반대 금리에 발행했다. 같은 날 교보자산신탁과 한국토지신탁도 각각 800억 원 규모의 사모채를 발행했다. 쌍용건설은 나흘 전인 26일에도 6.9%의 고금리로 사모채를 찍어 70억 원을 조달한 바 있다.
공모채 수요예측에 나섰다가 수요 미달 리스크를 안을 바엔, 금리 부담을 높여서라도 사모채로 자금을 확보하겠다는 기조로 풀이된다. 사모채 시장이 사실상 비우량 기업의 공모채 시장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 공모채 시장은 한산한 분위기다. 이달 공모채 수요예측이 예정된 발행사는 13곳에 불과하다. 상반기에는 한 주에만 30곳 가까이 수요예측에 나섰던 것과 비교하면 절반에도 못미친다. 무엇보다 투자기관들이 선호하는 우량 대기업 채권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연초 SK·포스코·LG 등 우량 대기업들이 선제 발행을 마친 반면, 하반기에는 석유화학, 건설 등 비우량 업종 기업들의 자금 조달이 이어지고 있다. AA급 공모채 발행사는 울산GPS(AA-), 한화리츠(AA-), 신한투자증권(AA0), 연합자산운용(AA0) 정도에 불과하다. 대체로 석유화학, 리츠(부동산투자회사·REITs), 금융회사가 주를 이루고 있다. 시장을 주도할 ‘대기업 간판급’ 우량채는 사실상 자취를 감췄다.
울산GPS는 SK가스의 지급보증을 받는 보증채를 발행해 자금을 확보한다. 이는 울산GPS가 원리금을 상환하지 못하면 SK가스가 대신 갚는다는 의미지만, 유동성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어 기관투자자들의 매수세가 활발하지 않은 편이다.
한화리츠 회사채 역시 담보부사채 형태로 발행된다. 담보를 제공하는 담보부사채는 일반적인 선순위 무보증 회사채보다 발행금리가 상대적으로 발행사에 유리하게 형성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최근 건설 업황 악화로 리츠 회사채에 대한 기관투자자들의 투자심리도 전반적으로 위축된 상황이다.
신용등급도 눈에 띄게 낮아졌다. 사실상 A등급대의 턱걸이로 통하는 ‘A-’급 CJ CGV, SK에코플랜트, 제이알글로벌리츠 등이 수요예측에 나섰다. BBB급 발행도 줄줄이 대기 중이다. BBB 등급의 중앙일보는 오는 11일, 깨끗한나라는 15일 수요예측을 앞두고 있다.
한 자산운용사 채권운용본부장은 “사실상 기관투자자들이 담을 수 있는 우량 회사채는 시장에서 사라졌다고 보면 된다”며 “남아 있는 발행 물량 대부분은 신용등급이 낮거나, 유동성이 떨어지는 비우량 채권이라 기관 입장에서는 투자 매력도가 크지 않다”라고 말했다.
하반기 공모채 발행이 뜸한 가장 큰 이유는 상반기 시장이 예상을 뛰어넘는 역대급 ‘호황’을 누렸기 때문이다. 금리 인하 기대감과 채권 투자에 대한 심리 회복이 맞물리면서, 많은 기업들이 조기 자금조달에 나섰다. 특히 대기업을 중심으로 연초부터 공격적으로 선제 발행이 이뤄졌고, 그 결과 올해 상반기 회사채 발행액은 75조 원을 돌파하며 역대 반기 기준 최대치를 기록했다.
하반기 들어 시장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미국의 관세 리스크에 따른 경기 하방 우려에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를 비롯한 주요국의 기준금리 인하 횟수에 대한 기대감도 줄어들었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8월 이후 연내 추가 인하를 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에 국내 시장금리 역시 바닥 수준을 지나왔다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기업 입장에서 추가 발행 수요도 크지 않다.
한 채권발행시장(DCM) 관계자는 “기업들이 필요한 자금을 이미 상반기에 조달해 놓은 데다 금리 인하 여력도 제한적인 만큼, 하반기엔 굳이 무리해 발행에 나설 필요 없이 만기 대응을 위한 차환 발행 등 제한적인 수요 중심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회사채 시장 자체가 조기에 북클로징(장부 마감)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