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 중립주의(Neutralism)’와 ‘외교적 중립(Diplomatic Neutrality)’은 개념이 다릅니다.
중립국은 어떤 동맹이나 특정 국가에 극단적으로 얽히지 않겠다는 국가 정책입니다. 군사는 물론, 정치와 외교ㆍ경제 분야에서 독자적인 자율성을 유지한다는 뜻이지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북유럽의 일부 중립국은 이 정책에서 벗어났습니다. 수백 년 동안 중립국을 유지해온 스웨덴을 비롯해 핀란드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에 가입했습니다. 러시아에서 시작한 지정학적 위기가 커졌던 시기였습니다.
이 와중에도 스위스는 영세중립국으로 이 지위를 십분 활용해왔습니다. 국제기구 본부를 유치하는 한편 외교와 금융 중심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런 중립국과 달리 외교적 중립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외교적 중립은 이른바 균형 외교인데요. 강대국 사이에서 양쪽과 관계를 ‘균형 있게 관리’하는 외교 전략입니다.
예컨대 한미 동맹을 견고하게 유지하면서도 한중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정책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정치ㆍ군사적으로 미국과 동맹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이익이 되는 국가와 협력해 실리를 추구하는 방식이지요. 냉전 시기 ‘비동맹운동(NAM)’도 대표적인 외교적 중립입니다. 인도와 이집트 등이 주도해 미국과 소련 어디에도 얽히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정부는 어떤가요. 새 정부 출범 직후부터 ‘중견국 전략 (Middle Power Diplomacy)’을 외교의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미·중 사이 균형 외교, 다자주의 강화, 실용 중심 외교, 그리고 글로벌 리더십 확대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특정 강대국 편향을 해소하는 한편 ‘양다리’가 아닌 ‘중재자적’ 역할을 공고히 하려는 전략이기도 합니다.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은 “앞으로 한국이 미국이나 중국 가운데 어느 한쪽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설정한 ‘레드라인’을 기반으로 외교 주도권을 행사하려 한다”고 평가했습니다.
다만 상황이 녹록지 않습니다. 내달 8일까지 미국과 관세 협상을 마무리하지 않으면 당장 그다음 날부터 25% 상호관세를 두들겨 맞을지 모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의 그간 행태를 따졌을 때 협상 종용보다 일방적인 관세 통보가 이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이처럼 미국과 동맹 관계를 유지하면서 관세 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의 축이 될 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일은 풀기 어려운 숙제입니다. 적잖은 리스크도 존재합니다.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완벽히’ 조율하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트럼프 행정부는 앞으로 한국에 중국과 '디커플링'을 강하게 요구할 겁니다. 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제삼자 제재, 이른바 '세컨더리 보이콧'에 나설 가능성도 큽니다. 거꾸로 우리가 미국의 요구를 마냥 수용할 경우 중국과의 경제협력 고리가 끊어질 수 있다는 위험이 존재합니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외교의 핵심인 '전략적 모호성'을 넘어 이제 명확한 신뢰선을 구축하는 게 필요합니다. 실리 외교의 핵심인 '양다리 정책'만 내세워서는 효과를 얻을 수 없다는 게 많은 전문가의 일치된 시각입니다. 동맹에 확실한 믿음을 주고, 경제적 동반자에게는 배신하지 않겠다는 신뢰를 심어야 합니다. 민감한 분야에서는 경제협력개발기국(OECD)와 세계무역기구(WTO) 등 국제기구ㆍ다자외교 채널도 십분 활용해야 합니다.
일부 피해는 불가피합니다. 피해 당사자인 국내 기업과 산업계ㆍ시민사회와의 사전 조율을 통해 외교적 충격을 상쇄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외교 정책의 일관성을 확보하고 예측 가능성을 구축하면 충격은 그만큼 줄어듭니다. 대안 마련이 가능해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 기업들은 미국 관세 폭탄에 이미 대응 중입니다. 이들은 관세가 두려운 게 아닙니다. 다른 나라보다 관세에서 불이익을 받을까 우려합니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이재명 대통령 앞에서 "경쟁국과 같은 관세, 동일한 조건이라면 한번 붙어볼 수 있다"는 자신감도 내비쳤습니다. 관세의 직접적인 피해를 걱정 중인 우리 기업은 이미 "맞서 보겠다"고 합니다. 가장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건 우리 정부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