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 7월 최인규 당시 서울시 디자인지원실장은 서울을 ‘비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빨리 만들고, 짓고, 세우는데 중독됐던 서울은 투박하고 거칠었다. 거리 가판대·보도블록·휴지통을 정돈하고, 안내표지·간판을 표준화했다. 본격적으로 몸을 가꾸기 전, 일종의 ‘독소 다이어트’였다.
13년 만인 2022년 9월 디자인정책관으로 돌아온 그는 서울을 ‘채우기’ 시작했다. 광장·한강·지하철역이 놀이터가 됐고, 광화문·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아트홀로 변했다. 방식은 다채롭지만, 목표는 단순하다. 사람들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 오세훈 서울시장이 도입한 ‘디자인 시정’의 밑그림 작업부터 함께해온 최 정책관을 16일 집무실에서 만났다.
서울이 ‘힙’해졌다. 서울·광화문·청계천 광장이 야외 도서관으로, 여의나루역이 러너스테이션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발상도 참신했지만, 공간의 매력을 끌어올린 건 디자인이었다. 빈백과 조명, 소반을 ‘오브제’로 배치해 책을 읽고 싶게 만들었고, 탈의실과 파우더룸을 설치해 달리기 쉽게 꾸몄다. 최 정책관은 “디자인은 지금까지 없던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공간을 창출하는 일”이라며 “장소도 개발하지만 무엇보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 ‘콘텐츠’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했다.
콘텐츠로 공간을 채워 새로운 경험을 창출하는 일은 민선 8기 디자인2.0 정책의 핵심 철학이다. 그는 “놀이동산에 가면 새로운 놀이기구를 찾는 것처럼 서울도 새로운 방식의 경험을 찾는 것”이라며 “콘텐츠를 통해 사람들이 모일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디자인이고, 그곳에서 감동 받도록 하는 게 큰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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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경관도 그 ‘작업’ 중 하나다. 서울시는 도심 한복판을 빛으로 물들이는 ‘서울라이트 광화문’, ‘서울라이트 DDP’를 선보이고 있다. 빛·예술·기술이 결합된 고품질 미디어아트로, 서울시 대표 문화예술 콘텐츠다. “요즘엔 야간 경관이 굉장히 중요해요. 민선 4기 때 조명의 균제도를 높이는 등 기본적인 작업을 했다면, 민선 8기에는 세계적 미디어아트라는 콘텐츠를 통해 매력도를 높이고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거죠.”
외국인을 매료시킨 공간이기도 하다. 그는 “가장 한국적인 광화문은 세계적인 작가들이 꼭 작업하고 싶어하는 곳”이라며 “DDP도 너무 매력적인 건축물이라 세계 유명 작가들이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했다. 민선 4기 때 오 시장이 건설을 추진한 DDP는 서울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당시 DDP를 왜 거기에 그렇게 만드냐고 했지만 지금 명소가 돼서 외국인들이 찾고 세계적 기업들도 많이 오잖아요. 건축도 매력적이지만 그 안의 콘텐츠들을 보고 오는 경우가 많아요.”
‘빌드업’의 결과였다. 일찌감치 디자인의 힘을 깨달은 오 시장은 “디자인으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디자인 시정’을 내세웠다. 2007년 5월 디자인 서울 총괄본부가 들어섰다. 최 정책관은 “머릿속 창의적인 생각이 구현되는 과정이 디자인이기 때문에 오 시장은 창의적인 사고가 교통, 복지, 문화 할 것 없이 전 행정에서 다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디자인 시정은 ‘창의행정’이었고, 곧 발상의 전환이었던 셈이다.

눈에 띄지 않는 작업도 많았다. 정보 디자인을 도입한 것도 이때였다. 대표적인 게 버스 도착을 알려주는 ‘버스정보시스템(BIS)’. “버스가 10분 후 온다는 걸 알면 좀 여유 있게 다른 일을 볼 수 있거든요. 그때 큰 원칙이 뭐였냐면 정보를 통해 시민들에게 여유를 주자는 거였어요. 행동 유도성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용어는 ‘어포던스(affordance)’라고 합니다.”
BIS는 민선 8기 들어와 더 진화했다. 서울 지하철 노선도를 40년 만에 개선했고, 단일 노선도도 업그레이드했다. 더 많은 정보를 담으면서도 직관적으로 알기 쉽게 표현했다. “옛날엔 어디서 내리는지만 중요했어요. 이번에 의도한 건 지리적 위치까지 알려주는 거예요. 어느 시점에서 강을 건너는지 또 어디서 서울을 벗어나는지 정보를 더 준다고 보면 됩니다. 환승도 신호등 방식으로 훨씬 정교하게 만들었어요. 색약자도 구분할 수 있게 색채도 미세하게 조정했습니다.”
서울알림체도 개발했다. 멀리서도 글자가 잘 보이도록 시인성을 높였다. 같은 면적에 글자 수를 더 많이 넣을 수 있게 설계했고, 노약자가 늘어난 점을 반영해 서체도 굵어졌다. 최 정책관은 “시민들에게 공공 정보를 빠르고 쉽게 또 정확하게 알려주기 위해 개발했다”며 ”지하철 노선도에도 다 적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도시가 자기 서체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몇 곳 있다”면서도 “뉴욕도 스스로 개발한 게 아니라 로마자 산세리프 글꼴인 헬베티카를 가져와서 쓰고 있는데 그런 측면에서 서울은 대단한 것”이라고 했다. “영어는 80~100자면 되지만 한글은 전부 다 표현하려면 1만1172자예요. 이걸 개발해서 일반인들도 프리 라이선스로 사용할 수 있게 하니 의미가 더 크죠. 디자인 강국이라는 건 표현되는 것뿐 아니라 표현을 위한 서체나 색채 등이 잘 정립돼 있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디자인으로 세계도 선도한다. 대표적인 게 마포대교 남단 여의도한강공원에 개장한 ‘여의롤장’이다. 롤링존에서는 자전거, 킥보드, 인라인스케이트 등 8가지 바퀴 달린 것을 함께 탈 수 있다. 그중 ‘백미’는 휠체어를 타고 달릴 수 있도록 배려한 ‘펌프트랙’. 최 정책관은 “펌프트랙은 다른 나라에도 있지만 휠체어를 탈 수 있는 펌프트랙은 서울에만 있다”고 했다. “초기에 휠체어 탄 여성분이 ‘그동안 이렇게 힘차게 타본 적이 없다’며 즐거워하는 걸 봤어요. 특히 일반인들과 한 공간에서 함께 할 수 있다는 게 더 의미 있지요.”
‘걷기 좋고 쉽게 접근하며 감동을 주는’ 디자인 덕분에 서울은 더 매력적인 도시로 변해가고 있다. 그는 “민선 4기 디자인1.0에서 8기 디자인2.0을 거치면서 보행성, 접근성, 그리고 콘텐츠가 강화됐다”며 “덮개공원, 한강버스 역시 접근성을 높이면서도 새로운 경험을 끝없이 창출하려는 시도”라고 했다. 이어 “즐겁게 걸으면서 쉽게 갈 수 있는 공간을 늘리고 랜드마크를 많이 만들어 도시의 매력도를 쌓아가는 게 중요하다”고도 했다.
글로벌 톱5 도시로의 도약도 꿈이 아니다. “디자인2.0으로 서울의 정체성을 만들었다면 디자인 3.0은 새로운 문화창조가 될 거예요. 우리가 만든 서울의 디자인 가이드라인으로 디자인 외교를 펼치면서 국제사회의 모범이 되면 글로벌 톱5 진입도 이뤄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