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배를 탔던 파트너가 적이 되다.”
국내 반도체 업계의 대표적 동맹으로 꼽히던 SK하이닉스와 한미반도체가 최근 정면충돌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HBM(고대역폭메모리) 패키징 핵심 장비 공급을 둘러싼 갈등이 깊어지면서 동맹군이 균열을 일으키는 모양새다. 향후 HBM 시장의 주도권 뿐 아니라 국내 반도체 장비 생태계에도 적잖은 파장을 미칠 전망이다.
SK하이닉스와 한미반도체는 지난 수년 간 HBM 패키징 공정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해온 파트너였다. SK하이닉스는 세계 최초로 HBM을 상용화한 기업이고, 한미반도체는 이 HBM 공정에서 필수적인 TC본더(열압착 본딩 장비)를 공급해왔다. 특히 SK하이닉스의 HBM3E가 엔비디아 등 AI 반도체 수요 증가로 주목받으면서, 양사의 기술 협력은 HBM 생태계의 ‘성공 공식’으로 통했다.
그러나 지난해 HBM 주문 판매량이 급격히 늘면서 SK하이닉스는 공급망 다변화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SK하이스가 싱가포르 반도체 장비회사 ASMPT과 손을 잡으면서 양사 관계에 이상 신호가 감지됐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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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SK하이닉스가 한화세미텍과 420억원 규모의 TC본더 공급 계약을 체결하면서 한미반도체가 특단의 조치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한미반도체는 한화세미텍을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하는 등 두 회사의 악연은 깊다.
이에 곽동신 한미반도체 회장은 지난달 대외 메시지를 통해 "후발주자인 ASMPT, 한화세미텍과 한미반도체 TC본더는 상당한 기술력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한화세미텍이 SK하이닉스로부터 수주를 받았지만 결국 유야무야, 흐지부지하게 소량의 수주만 받게 될 것"이라고 불편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특히 한화세미텍의 TC본더 납품가격이 한미반도체가 지난 8년간 공급했던 금액보다 높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한미반도체와 한화세미텍은 TC본더의 납품가격을 구체적으로 공개하지 않는다. 업계에서는 한화세미텍이 TC본더 한 대당 약 30억~35억원 내외, 한미반도체는 이보다 낮은 25억~29억 원선에서 SK하이닉스에 납품해 온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반발한 한미반도체는 SK하이닉스의 생산라인에서 자사 엔지니어를 철수시키고, 장비 가격 인상까지 통보하며 맞섰다.
다만 업계에서는 전 세계 HBM 시장 1위인 SK하이닉스가 늘어나는 HBM 수요에 적기 대응하려면 관련 장비 공급사의 이원화는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생태계에서 공급망을 다변화하는 것은 가격 인상과 공급 지연 등 각종 리스크를 덜 수 있는 전략"이라며 "엔비디아가 SK하이닉스뿐 아니라 삼성전자나 마이크론으로부터 HBM을 받으려는 것도 같은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공급망 다변화의 비즈니스 관점에서 보면 회사 간 이견 발생은 매우 일상적인 일"이라며 "특히 SK하이닉스 입장에선 HBM 수요가 확대되고 이에 따라 TC본더 수요 역시 커지고 있어 벤더 이원화는 필수적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SK하이닉스는 당장 HBM3E 대량 양산에 차질이 없도록 한화세미텍 외에도 싱가포르 ASMPT와의 협력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독점 공급 구조에서 벗어나 경쟁 체제를 구축하겠다는 의지다. 업계 관계자는 “SK가 장비 공급선 다변화를 통해 기술 종속 리스크를 줄이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반도체 역시 SK하이닉스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미국 마이크론과의 협력 강화, 삼성전자와의 잠재적 연대 등 '우회로'를 찾고 있다. 실제로 삼성은 차세대 HBM 패키징 공정 다변화를 시도 중이며 한미와의 협업이 성사될 경우 SK-한미 간 대결구도가 업계 전체로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조만간 신규 TC본더 장비 발주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오는 24일 SK하이닉스 1분기 실적발표에서 TC본더 장비 공급 및 협상 상황에 대한 언급이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번 사태는 국내 반도체 산업 전반에 적잖은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단일 공급사에 의존했던 시스템이 기업 간 이해 충돌로 무너질 수 있다는 점 등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HBM은 AI 시대 반도체 경쟁력의 핵심인데, 공급망 갈등이 장기화되면 SK하이닉스는 물론 한국 반도체 전반에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