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우즈베키스탄의 우승으로 '2025 아시아축구연맹(AFC) 17세 이하(U-17) 아시안컵'이 막을 내렸습니다. 이 대회는 이후 열릴 U-17 월드컵 출전권이 걸린 대회인 만큼 일정 부분 화제가 됐어요. 하지만 한국 내에서는 이례적으로 일본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의 ‘설레발’ 때문에 U-17 아시안컵 우승 여부보다 한국과 일본 팀의 대회 성적 결과가 더 화제가 됐습니다.
이 대회 본선 1차전에서 한국은 인도네시아에 0-1로 충격패하고 일본은 아랍에미리트를 4-1로 가볍게 제압했어요. 그런데 1차전이 끝나고 얼마 안 돼 가게야마 마사나가 일본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이 “라이벌이었던 한국 축구의 수준이 떨어진 것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이 화제가 됐죠.
이후 대회 결과가 나오며 발언은 더 화제가 됐습니다. 축구 수준이 떨어졌다 평가받은 한국은 2승 1패로 8강에 진출했고, 4강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어요. 반면 일본은 1차전 대승 이후 졸전을 거듭하며 2차전은 베트남과 비기고 3차전은 호주에 패배했습니다. 일본은 1승 1무 1패, 득실차로 간신히 8강 토너먼트엔 진출했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 승부차기 끝에 패배하며 8강에서 짐을 싸며 한국보다 못한 결과를 냈어요. 이 결과에 축구팬들이 일본을 향해 “역시 설레발은 필패”라며 조롱당한 것은 덤입니다.
축구계는 물론 스포츠 역사엔 ‘설레발은 필패’라는 명언 아닌 명언이 있습니다. 설레발을 치다가 그보다 못한 결과를 얻거나 입을 조심하지 못해 패배 후 더 크게 조롱받는 사례가 빈번했기 때문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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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설레발은 다행히 관심도가 상대적으로 덜한 U-17 대회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기억될 일은 없겠지만, 축구팬은 물론 모두의 관심이 극에 달하는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과 관련한 설레발은 오랫동안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합니다.

2002 한일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일본은 축구 분야에서만큼은 라이벌 한국을 제친 것은 물론 ‘탈아입구’에 성공했다는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어요. 월드컵 전 성적이 그 근거가 됐죠. 필립 트루시에 감독 선임 후 치러진 2000 AFC 아시안컵에서 우승했고, 2001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준우승하는 과정에서 브라질과 비기는 등 좋은 모습을 보여줬어요.
이후 개최된 월드컵에서 일본은 사상 첫 16강 진출, 그것도 조 1위로 성공하며 자신감이 더 커졌죠. 16강 상대가 조별리그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던 튀르키예(당시 터키)로 정해지자 아시아를 대표해서 8강은 당연하다는 분위기가 팽배했어요. 브라질 대신 튀르키예면 남는 장사인 건 사실이죠.
당시 일본 언론은 “우리의 16강 상대는 튀르키예고, 한국은 이탈리아다. 아시아를 대표해 8강 진출을 하는 게 일본이 되는 것은 당연하고, 4강 진출을 위해선 8강 상대로 확정된 세네갈을 조심해야 한다”는 논조의 기사가 상당했어요. 세네갈 전력을 분석하는 프로도 방송이 될 정도였으니 설레발이 엄청났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설레발과 함께 시작된 16강 경기에서 일본은 0-1로 튀르키예에게 패하며 대회를 마감했어요. 당시 경기 주심도 ‘외계인 심판’이라는 별명과 함께 공명정대한 경기 진행으로 당대를 호령한 피에를루이지 콜리나여서 승부조작 의혹도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아시아를 대표해 월드컵 8강을 간 팀은 한 수 아래로 여기던 라이벌 한국이었어요. 이 대회에서 한국은 아시아를 대표해 아시아 최초 4강까지 진출하며 일본을 더 머쓱하게 만들었습니다.

매번 월드컵에서 우승 설레발을 치는 나라들은 끊임없이 나오는데, 그 전통의 시작이 어디냐고 물으면 최다 우승 국가인 브라질을 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950 FIFA 브라질 월드컵 당시 브라질 국민은 최초 우승의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세계대전 이후 12년 만에 브라질에서 월드컵이 개최됐고, 최대 라이벌 아르헨티나는 개최국 선정에 불만을 품으며 기권했죠. 또한, 우승 후보로 평가받던 잉글랜드는 미국에 충격패하며 탈락했고, 이탈리아는 비행기 참사로 국가대표급 선수 다수를 잃은 ‘수페르가의 비극’ 사건으로 인한 전력 약화를 극복하지 못한 채 4강 결선리그 진출에 실패했어요.
당시 월드컵은 토너먼트로 진행되지 않고, 조별리그 후 1위 팀들끼리 4강에서 다시 리그전을 치러 승점이 높은 팀이 우승컵을 차지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브라질은 상대 팀인 우루과이를 상대로 무승부만 해도 우승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또한, 브라질은 상대 팀들을 쉽게 물리쳤지만, 우루과이는 혈전을 거듭하며 간신히 승점을 획득한 상황이었기에 사람들은 모두 브라질의 승리를 점쳤습니다.
이러다 보니 브라질 월드컵 조직위원회는 경기가 끝나기 전에 미리 월드컵 우승 메달에 브라질의 이름을 넣었고, 브라질 당국은 우승 퍼레이드를 준비 중이었어요. 언론들 역시 우승팀은 이미 정해졌다는 기사를 쏟아냈고, FIFA 역시 그 분위기에 힘입어 포르투갈어로만 된 우승 축사를 만들어오는 등 김칫국의 정점이었습니다.
하지만 경기 결과는 우루과이의 2-1 역전승으로 끝났습니다. 브라질 축구협회는 너무나 충격을 받은 나머지 부정이 탄다며 국가대표 유니폼도 흰색에서 현재의 노란색 유니폼으로 변경했어요. 브라질은 이날의 사건을 ‘마라카낭의 비극’이라 부르며 다시는 이러한 비극을 재현하지 말자고 맹세했죠.
2014년 다시 한번 월드컵을 개최한 브라질은 이번에야말로 홈 우승을 이루겠다고 다짐했죠. 우승을 통해 그날의 비극을 잊고자 경제가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무리하게 월드컵을 개최한 거예요. 월드컵 개최를 반대하는 국민도 많았지만, 브라질 정부는 “우승하면 다 잘될 거야”는 마음가짐으로 개최를 밀어붙였죠.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6번째 대관식을 준비하라!”고 설레발치는 구호를 준비한 것은 덤입니다.
결론적으로 그날의 비극은 상당 부분 잊히는 데 성공했어요. 다만 우승이 아닌 더 엄청난 흑역사를 달성했죠. 브라질은 독일과의 준결승전 경기에서 1-7이라는 엄청난 점수 차로 대패를 당했습니다. 브라질의 월드컵 역사는 물론 A매치 축구 역사상 최다 점수 차 패배 타이를 기록했고, 월드컵 한 경기 최다 실점 기록을 갈아치웠어요. ‘마라카낭의 비극’이 ‘미네이랑의 비극’으로 대체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시아의 호랑이를 자부하는 한국 대표팀은 2002년 4강 신화의 영광, 2010년의 첫 원정 16강 이후 2014년 월드컵을 준비하며 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박지성, 대표 수비수 이영표가 2011년 국가대표에서 은퇴했고, 이후 대표팀은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간신히 통과하는 등 불안감만 키워가고 있었어요.
2010년 이후 2명의 감독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며 대표팀에서 물러났고, 이에 대한축구협회는 2002년 4강 신화의 주역, 한국의 영원한 리베로 홍명보를 감독으로 선임했죠. 지금이야 홍명보에 대한 평가가 낮지만, 이 당시만 해도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을 이끈 유망한 감독이라 국민의 마음을 돌리기엔 충분했습니다.
국민의 기대감을 등에 업은 홍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첫 원정 8강이 목표”라고 당당히 말했어요. 이후 평가전에서 졸전을 이어가고 선수진 선발에서 잡음이 계속됐지만, 월드컵 조 추첨 결과가 독이 됐습니다. 조 추첨 결과 벨기에, 러시아, 알제리라는 상대적으로 해볼 만하다고 평가되는 팀들이 결정되면서 국민은 물론 언론들도 팀이 좀 흔들리긴 하지만 ‘역대급 꿀조’에 들어갔다며 16강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커졌어요. 특히, 가장 약체로 평가된 알제리를 두고 ‘1승 제물’이라고 깎아내렸죠.
월드컵 본선을 시작한 대표팀은 1차전 러시아와의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거두며 나쁘지 않은 시작을 했습니다. 이에 2차전 알제리를 꺾고 16강 진출 9부 능선을 넘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가득했어요.
하지만 꿀조에서 가장 달콤한 꿀은 한국 대표팀이었고, 한국이 알제리의 1승 제물이 됐습니다. 알제리는 한국을 철저히 분석하고 나와 시종일관 몰아붙였고, 전반에만 3점 차를 내며 승부를 일찌감치 결정지었죠. 결국 최종 경기 결과 2-4로 대표팀이 완패를 당했어요. 이 경기의 결과로 대표팀의 16강 진출 실패는 사실상 확정됐죠.
홍명보 감독은 이때의 패배로 불명예스럽게 감독직에서 사퇴하게 됩니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지나 다시 한번 대표팀의 사령탑이 됐어요. 이번에도 16강을 넘어서는 목표를 설정했고, 취임사에서 “한국 축구를 위해 도전하겠다”고 말했죠. 명예 회복 등 개인적인 욕심은 없다고 밝혔지만, 그건 본인만이 알 일입니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이번엔 국민의 기대가 매우 낮아졌다는 것이고 2014년과 달리 현재 흔들리는 대표팀을 보며 그 누구도 헛된 설레발을 치지 않는다는 거죠. 설레발이 없는 이번 대표팀이 ‘설레발은 필패’라는 공식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은 그나마 긍정적인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