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풍경] 향수 이름은 ‘삶의 No 1’

입력 2023-06-2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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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고 긴 장화에 음식물로 얼룩진 앞치마를 걸친 아주머니는 미안한 듯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제가 너무 바빠서 그만….” 힘없는 목소리로 사과하던 그분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누군가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또 다른 사람은 코를 움켜쥔 채였다. 그제야 응급실을 채운 비릿함에 섞인 정체 모를 냄새가 느껴졌다. 아주머니로부터 풍기는 냄새였다.

병원엔 수많은 냄새를 가진 이들이 찾아온다. 그나마 술에 취한 사람의 냄새는 참을 만하다. 피비린내, 고름에서 나는 썩은 냄새부터 노숙자의 냄새, 그리고 부패한 사체의 냄새까지. 때론 그것들이 뒤섞이고 병원 특유의 향까지 더해져 현기증이 일어나는 날도 있다. 햇병아리 의사 시절엔 마스크를 두 개도 쓰고 잠깐 피해 있다 오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냄새에 익숙해지고 무뎌진 코가 나를 악취 속에서도 오래 견디게끔 해 주었다. 하지만 심한 냄새를 참을 수 있게 된 건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응급실에서 악취를 풍긴 아주머니는 내 단골 환자다. 시장에서 생선과 젓갈을 파는 분인데 위경련으로 가끔 병원을 방문한다. 통증이 갑자기 오고 참을 수 없기에 씻거나 옷을 갈아입을 여유조차 없고, 특히 생선 비린내와 젓갈류 냄새가 섞인 특유의 향은 심하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공기 중에 머무른다. 누구도 참기 힘든 냄새, 하지만 난 그분의 사정을 알기에 감히 코를 막거나 인상을 찌푸릴 수는 없다. 남편을 여의고 자녀를 키우기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또 웬만한 아픔은 혼자 견뎌야만 했을 시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도 알게 모르게 냄새가 밴다. 언젠가 환자 때문에 며칠 밤을 새운 후 세탁소에 맡긴 옷을 찾으러 갔을 때 주인이 “병원에 근무하시나 봐요”라고 묻던 기억이 난다. 냄새가 밴다는 것, 그건 우리가 삶에 충실했다는 증거다. 음식점에서 시장에서 그리고 삶의 곳곳에서, 성실하게 그곳을 지켜낸 사람들이 풍기는 특유의 냄새, 나는 그것을 향기라 칭하고 싶다. 이름하여 ‘삶의 No 1’. 그렇기에 그 냄새는 내 코를 틀어쥐게끔 하기보단 내 속에 진하게 배어든다.

하지만 슬프게도 모든 것이 그렇지만은 않다. 요즘 세상엔 코를 틀어쥐고 싶은 역겨운 냄새들도 있다. 직접 맡진 못해도 신문에서 또 TV 뉴스를 통해 전해지는 그 냄새가 종종 구토를 유발하게끔 만든다. 그런 날이면 난 시장통 생선가게 아주머니의 향기, 하수구 청소를 막 끝낸 어느 젊은 청년의 향기가 그리워진다. 그 향기로 역겨운 냄새들을 가릴 순 없을까?

그날이 오길 간절히 고대하며 난 오늘도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고 치료 시기를 놓친, 어느 당뇨환자의 농(膿)이 찬 다리에 코를 박은 채 진료실을 지킨다.박관석 보령신제일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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