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기술이 항상 승리하는 건 아니다

입력 2023-04-2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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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에는 동네마다 큰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다. 당시에는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대여점에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와야만 했다. 까맣고 투박한 비디오테이프 오른쪽 위에는 언제나 ‘VHS’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됐지만 VHS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비디오테이프의 전성기를 이끈 제품이다.

1976년 일본의 빅터(JVC)가 만든 VHS는 출시 초기 소니의 베타맥스와의 경쟁에서 밀렸다. 베타맥스는 VHS보다 기술력에서 앞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화질이 더 좋을 뿐 아니라 크기도 작아 휴대하기 편리했다. 하지만 베타맥스는 VHS에 역전당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VHS가 값싼 가격과 범용성 등으로 시장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고의 기술이 시장에서 언제나 승리하는 건 아니다. VHS의 사례를 보면 최근의 배터리 시장이 떠오른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국내 배터리 업체는 기술을 무기로 삼원계 배터리와 전고체 배터리 등 고품질 제품개발에 주력해왔다. 저렴한 가격을 내세운 중국 업체와 달리 프리미엄 전략을 고수해온 것이다.

그런데 최근 배터리 시장에서는 ‘가격’이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완성차 업계에서 치열한 가격 경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완성차 업체들은 전기차 가격을 낮추기 위해 LFP(리튬·인산·철) 등 저렴한 배터리에 눈을 돌리고 있다. 포드에 이어 테슬라가 LFP를 주력으로 하는 중국 배터리 업체 CATL과 손을 잡는 이유다.

물론 초격차 기술 전략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다만 기술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시대와 상황이다. 전기차 산업이 태동하는 현재 상황에서 시장이 원하고 있는 것은 기술보다 저렴한 가격이다. 프리미엄 전략만 고수하다가는 시장을 선점하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 국내 배터리 업계가 늦게라도 보급형 배터리 시장에 뛰어든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최근 정부는 민관합동으로 전고체 배터리를 비롯한 차세대 배터리 개발에 2030년까지 20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전고체 배터리는 ‘꿈의 배터리’로 불리지만 비싼 가격이 한계로 지적된다. 힘들게 개발하더라도 시장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무의미하다. 시대와 상황에 맞는 유연한 전략이 요구된다. 베타맥스처럼 비운의 명기(名器)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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