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각]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

입력 2022-02-2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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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학 저술가

최근 우연히 ‘포레스트 검프’(로버트 저메키스 감독, 1994)란 영화를 다시 봤다. 또래에 견줘 영특하지 못한 지능과 장애를 가진 소년이 꿈을 좇아 달리는 이야기다. 배우 톰 행크스의 연기는 사실적 풍부함으로 생생하고,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는 명대사는 여전히 빛난다. 또래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하지만, 어머니와 첫사랑 소녀 제니를 향한 사랑으로 난관을 넘고 달리는 포레스트 검프에게는 영악한 사람들에겐 찾기 힘든 단순한 명석함과 품격이 있다. 오로지 달리는 재능 하나로 미식축구 선수가 되어 성공을 거두고, 베트남전에 참전해서 곤경에 빠진 동료를 불굴의 용기로 구해낸 수훈을 세워 무공훈장을 받는 포레스트 검프. 첫사랑 제니와는 자꾸 어긋나고, 후원자인 어머니는 병으로 죽어 혼자 떠도는 포레스트 검프. 그렇건만 편견과 차별에 꺾이지 않고 난바다 같은 세상에서 제 뜻을 펼쳐나가는 포레스트 검프. ‘포레스트 검프’의 장면들이 스쳐가는 동안 노스탤지어 한 줄기가 흉중에 살아나며 불현듯 나를 1960년대로 데려간다.

1960년대는 서울 인구가 3백만을 넘어서고, 작가 이호철은 과밀 인구와 그로 인한 대도시의 세태 변화를 풍자하는 장편소설 ‘서울은 만원이다’를 내놓은 때다. 시골에서 상경한 소년이던 나는 백 명이 넘는 초등학생들을 한 교실에 욱여넣고, 그마저도 오전 오후반으로 나눠 수업하는 서울 학교의 과밀 학급에서 공부를 하는 게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 1960년대는 내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는가? 선데이서울, 통기타와 생맥주, 주말 교외선마다 넘치던 젊은이들과 통기타와 노랫소리, 가을이면 열리던 문학의 밤들, 처음 발급된 주민등록증, 흑백TV의 대한늬우스, 프로레슬링, 혼분식 장려운동, 동백림 간첩사건, ‘증산 수출 건설’ 같은 생산 독려 표어들, 여배우 문희와 남정임이 나온 달력들, 엄앵란과 신성일의 멜로영화들, 박노식과 장동휘가 휘젓던 액션 영화들, 김희갑과 구봉서와 배삼룡 같은 전설적인 희극인들, 소화제 활명수, 국민교육헌장, 재건데이트, 겨울엔 연탄가게, 여름엔 얼음가게로 철을 바꿔 겸업을 하던 동네 가게, 새끼줄에 꿰어 낱개로 팔리던 연탄, 봉지쌀. 그리고 중절모를 쓰고 나와 노래를 하던 배호가 있었다.

인구 1천만 명이 밀집한 서울 같은 메가 시티에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거의 모든 도시 거주자는 매일같이 음성들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합창에 참여한다. 거의 낯선 자, 완전히 낯선 자들 사이에서 가끔 아리아를 부를 때도 있겠지만 주로 합창에, 부르고 답하는 노래에 가담하여 사소한 언어적 응대를 주고받는다.”(올리비아 랭, ‘외로운 도시’) 어느 시대에나 상처받은 짐승이 제 상처를 핥듯 제 불우함에 속울음을 울며 외로움을 곱씹는 대중은 제 정서를 노래로 불러줄 가수를 찾는데, 1960년대가 호명한 가수는 배호였다. “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삼각지”(‘돌아가는 삼각지’, 1966), “막막한 이 한밤을 술에 타서 마시며/흘러간 세월 속을 헐벗고 간다”(‘황금의 눈’, 1968), “사나이 가슴속에 비만 내린다”(‘비내리는 명동’, 1970) 같은 노래가 전달하는 정서는 저 반세기 전 서울의 화사함과 풍요를 거머쥔 상류층이 아니라 농촌을 등지고 올라와 향수에 허덕이며 뒷골목을 배회하는 무단 상경자의 정처 없음과 막막함이었다.

배호의 중후한 중저음의 노래가 자주 울려 퍼지던 서울에는 사기꾼, 야바위꾼, 소매치기, 좀도둑들이 들끓었으니, 시골 사람들은 이런 서울을 두고 ‘눈 감으면 코 베가는’ 세상이라고 경원시했다. 돌이켜보면 그런 서울에도 포레스트 검프 같이 제 재능을 갈고 닦는 착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꽤 많았다. 달동네, 낮은 처마의 집들, 미로 같은 골목길이 있던 시절, 저마다 다른 생업으로 가난한 살림을 꾸리던 이웃 사이에 인정이 살아 있었다. 그들은 사랑하고, 마시고, 미소짓는 것을 고민하지 않았다. 가난했을지언정 먹고, 마시고, 웃는 게 자연스러웠다. 이웃의 것을 탐내지 않고, 이웃이 이룬 성공을 시기하지도 않았다. 속절없이 세월이 흐르며 우리가 나이를 먹기도 전에 가수 배호는 단명했다. 우리는 간간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배호의 노래를 들었다. 그 사이 서울시장은 몇 번이나 바뀌었다. 달동네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고층아파트들이 들어선다. 골목들이 사라지고 그 골목 안 착한 사람들, 절망의 날 견뎌내면 기쁨의 날 찾아오리, 하는 희망으로 나날의 삶을 잇던 이들은 어디론가 다 흩어졌다. 가난 속에서 어린 자식들을 거두던 어머니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우리 다섯 남매도 다 뿔뿔이 흩어져 산다. 이제 남은 것은 다들 야무지고 똑똑한 사람들뿐 착하고 어리숙한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물자는 풍부해지고 생활 수준은 높아졌지만, 세상은 훨씬 각박해지고 사는 건 팍팍해졌다. 세상엔 악인들이 득세하고, 착한 사람들은 자꾸 주저앉았다. 사악한 사건들이 더 자주 일어난다. 우리를 놀라게 한 사건 중 하나가 2020년 10월, 생후 16개월 된 여자아이가 서울 양천구에서 양부모의 학대로 숨진 사건이다. ‘정인이’는 밥을 먹지 않는다고 학대를 당하다가 심장이 멈춰진 상태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가 사망하는데, 국립과학수사원은 사인을 ‘외력에 의한 복부손상’으로 발표한다. 부검해 보니 급격하고 강력한 외부 충격으로 팔꿈치와 갈비뼈가 부러지고, 췌장이 끊어지고, 후두부와 쇄골, 대퇴골 등이 부러진 게 드러났다. 자기방어의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를 사나운 기세로 누르고 때리고 집어던지는 학대로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에 우리는 얼마나 놀라고 치를 떨었던가! 그들을 사람이라고 부를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사악한지를 모르는 그들은 뻔뻔하고 사악한 ‘괴물’ 그 자체였다. 이런 ‘괴물’들이 날뛰는 세상에서 산다는 게 끔찍했다.

우리의 소망이란 그리 거창하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에 와 우짖는 새소리를 들으며 사과 한 알을 먹는 것, 봄엔 뱀들이 동면에서 깨어나고 모란과 작약이 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 초원과 울창한 숲을 향해 한참 동안 서 있어 보는 것, 밋밋한 저녁에 모차르트의 음악에 빠져들어보는 것, 올빼미가 울부짖는 겨울밤에 식구와 함께 있는 것, 여름엔 수박과 복숭아를 깨물어 먹는 것, 늦여름에 피어나는 장미꽃을 보는 것, 눈 덮인 숲속의 고요 속에서 가만히 서서 나뭇가지 위에 쌓인 눈이 떨어지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는 꿈을 간직하며 사는 것, 거짓과 사악함으로 일을 꾀하는 악인들은 쇠락하고,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 제 일에서 성공을 하고 보람을 누리는 것, 사소한 것들에 주어진 기쁨을 누리는 것 따위다.

인간의 난관과 불행은 땅에서 벗어나 라일락이나 은행나무보다 더 높은 곳에서 살고, 초저녁 별들보다 더 많은 등을 켜는 것에서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건물들이 높아졌다고 인류의 꿈이 더 높아졌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백열등이 발명된 뒤 인류 평균 수면시간은 한 시간이나 줄었다. 수단은 진보했으나 현실은 한 뼘도 더 나아지지 못한 탓이다.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은 물건들을 사들이고 더 큰 집에 살아도 기쁨과 보람이 커지지는 않는다. 추운 겨울밤에 잠자리를 찾아 떠돌던 갈색 고양이를 잊지 마라. 벌이가 시원치 않고, 누추한 집에 산다고, 삶이 밋밋하다고 상처받지 말라. 우리가 영원 아래 잠시 서 있다 떠나는 존재임을 잊지 마라. 자신이 슈퍼히어로가 아니라는 사실에 낙담하지 말라. 더 행복해지고 싶다면, ‘고마워, 나의 운명’ 하고 제 평범한 삶을 끌어안아라. 나날의 자그마한 일들에 성실하고 작은 성공에 기뻐하며 웃어라. 웃고 노래하고 춤추라! 행복해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아니라 노래하고 춤추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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