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가 온기를 높이는 커피 이야기]② 여의도엔 ‘고요한 카페’가 있다

입력 2021-06-02 14:45 수정 2021-06-02 18:39

좀처럼 장애인 사업장을 찾기 어려웠던 여의도 증권가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봉사나 기부 차원을 넘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장애인 사업장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죠. 최근 ESG 경영을 실천하려는 움직임이 잇따르면서 장애인 바리스타 카페가 증권가의 고용 상생 모델로도 주목받는 분위기입니다. 이투데이는 이들이 만든 ‘커피 한 잔’의 의미를 함께 들여다봅니다.

▲서울 여의도 CCMM빌딩 이지스 사내카페.  (유혜림 기자 wiseforest@)
▲서울 여의도 CCMM빌딩 이지스 사내카페. (유혜림 기자 wiseforest@)

동여의도와 서여의도 사이, 이곳에 '고요한 카페'가 있다.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이지스자산운용은 2019년 8월부터 청각장애인 바리스타가 근무하는 사내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메모지' 주문이 '키오스크'로 바뀌기까지

▲이지스자산운용 사내카페의 키오스크. 주문과 동시에 좌측 기계에서 진동벨이 올라온다.  (유혜림 기자 wiseforest@)
▲이지스자산운용 사내카페의 키오스크. 주문과 동시에 좌측 기계에서 진동벨이 올라온다. (유혜림 기자 wiseforest@)

이곳에선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키오스크'가 직원들을 기다린다. '연하게ㆍ진하게, 시럽 추가' 등 아메리카노 한잔에 이렇게 많이 요구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세세한' 옵션 기능이 있다. 바리스타를 따로 찾지 않더라도 키오스크를 통해 '취향껏' 커피를 주문할 수 있도록 마련됐다.

'시럽 없이, 샷은 연한 아메리카노.' 주문을 마치니 키오스크 왼쪽 장치에서 '진동벨'이 자동으로 올라왔다. 이곳에선 '커피가 나왔으니 찾아가라'는 외침도 필요 없다. 청각장애인 바리스타 김지영(가명) 씨가 커피 머신으로 다가가 차분히 에스프레소 샷을 내렸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일터'를 만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지영 씨는 그동안 사람들의 입 모양과 표정을 읽어내면서 간간히 소통해 왔지만, 이제는 이마저도 쉽지 않아졌다. 코로나19 이후 일상이 된 마스크가 소통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벽이 됐다. 청각장애인은 단순히 수어의 손동작뿐 아니라 표정, 몸 방향 등 비언어적인 기호를 통해서도 세상과 소통한다.

그래도 이곳 바리스타들은 키오스크 덕분에 주문을 놓치지 않고 챙길 수 있다고 했다. 누군가는 키오스크가 디지털 소외를 만든다고 지적하지만 적어도 이곳 만큼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일터를 잇는 소통 창구 역할을 해냈다. 이 카페의 총 책임자인 윤혜정 씨는 새로운 메뉴가 출시할 때마다 키오스크 선택창을 업데이트한다.

이곳의 인기메뉴는 '콜드브루'다. 떫은 맛도 덜하고 부드러운 풍미도 잘 담아냈다. 사실 콜드브루는 미리 추출해둔 원액에 물만 타서 내놓으면 끝이다. 바리스타별로 다른 업무 능력 편차를 줄이는 데도 최적화된 메뉴이기도 하다. 카페 곳곳에선 ‘바쁘신 분은 콜드브루를 주문해주세요’라는 문구가 붙어있다. 맛도 좋지만 주문량이 밀릴 때 콜드브루를 시키는 작은 배려가 인기를 더했다.

대신에 이곳 바리스타들은 최고의 맛과 서비스를 보답하려고 노력한다. 높은 퀄리티의 신선한 원두를 사용하고 '달고나 라떼', '매실차' 등 다양한 신메뉴도 선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친환경'에 관심이 많아진 분위기를 고려해 '에코 종이컵'으로 바꿨다.

사회적 거리두기, 장애인 근로자는 사회와 더 멀어진다

이지스자산운용이 청각장애인 바리스타를 고용한 지도 올해로 3년 차다. 한 곳에서 시작한 카페는 사무실이 하나 더 생기면서 두 곳으로 늘었다. 총 4명의 청각장애인 바리스타가 하루 평균 총 500~600잔의 음료를 만든다. 직원들에게는 휴식 공간을, 사회적 약자에게는 '일터'를 제공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다.

모든 재난이 그렇듯 코로나 사태는 사회적 약자에게 더 가혹했다. 최근 1년 동안 일자리를 잃고 실업급여(법적인 명칭은 구직급여)를 신청한 장애인 노동자는 3만4000여 명에 달한 것으로 집계됐다.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이 한국고용정보원으로부터 받은 ‘장애인 임금근로자 구직급여 신청 현황’에 따르면, 장애인 고용률은 2016년 36.1%에서 지난해 34.9%로 줄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직업 훈련 기회 자체가 줄어들었다. 이에 올해 이지스자산운용은 서울시 장애여성인력개발센터와 손잡고 장애여성의 바리스타 꿈을 지원하기로 했다. ESG를 투자 포트폴리오에서만 고려할 게 아니라 일터 곳곳에서도 심겠다는 취지에서다. 회사가 직접 운영하는 사내카페를 통해 현장실습 기회를 제공하고 사내 바리스타 채용과도 연계할 계획이다.

▲이지스자산운용과 서울시 장애여성인력개발센터가 4월 21일 서울 여의도 CCMM빌딩 이지스 사무실에서 상호협력 협약을 체결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장애여성인력개발센터 이정아 총괄팀장, 정영혜 센터장, 이지스자산운용 이현종 기업문화디자인센터장, 윤혜정 사내카페 매니저. (사진제공=이지스자산운용)
▲이지스자산운용과 서울시 장애여성인력개발센터가 4월 21일 서울 여의도 CCMM빌딩 이지스 사무실에서 상호협력 협약을 체결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장애여성인력개발센터 이정아 총괄팀장, 정영혜 센터장, 이지스자산운용 이현종 기업문화디자인센터장, 윤혜정 사내카페 매니저. (사진제공=이지스자산운용)

정영혜 장애여성인력개발센터 센터장은 "바리스타 교육을 희망하는 교육생들은 늘어나고 있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 직업 훈련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며 "장애인들에게 일터는 사회에서 이들이 고립되지 않도록 하는 안전망과 같다"고 말했다.

이어 "장애여성 실습과 채용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기업을 어렵게 찾아다녔는데, 먼저 협력을 제안해준 기업은 이지스가 처음”이라며 “특히, 이지스 사내카페의 채용도 연계됨에 따라 교육생이 앞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을 미리 체험하는 기회라는 점에서도 뜻깊다”고 말했다.

윤혜정 씨는 사내카페가 더 많아져서 장애인 바리스타가 활동할 수 있는 일자리도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그는 "사내 카페의 특징은 바리스타와 손님 모두 동료라는 것"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동료'로서 존중할 수 있는 분위기도 생긴다. 다른 기업들도 장애인 고용에 함께 동참해줬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날 윤 씨는 스마트폰을 들어 보이면서 이곳 바리스타와 조용한 '수다'를 나눴다. 음성 인식이 잘 될 수 있도록 천천히 말하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곳 고요한 카페는 누구든 불완전하다는 걸 깨닫고, 각자가 가진 감각을 나눈다. 오가는 커피 한잔이 이어주는 서로에게 소중한 '일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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