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석] 성두섭·이진희 "'렁스'로 판도라의 상자 열었죠"

입력 2020-06-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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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달 5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연극의 힘 느꼈다"

▲연극 ‘렁스’에 출연한 배우 이진희(오른쪽)와 성두섭이 3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이투데이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태현 기자 holjjak@
▲연극 ‘렁스’에 출연한 배우 이진희(오른쪽)와 성두섭이 3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이투데이와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신태현 기자 holjjak@
"비행으로 치면 런던에서 뉴욕까지 몇 번을 왕복해야 그만큼 탄소량이 발생할지 계산해봤어. 2550번, 내가 7년간 매일같이 뉴욕을 왔다 갔다 해도 아이를 갖는 것보다 발생하는 탄소 발자국이 적어. 1만 톤이야. 이산화탄소가 1만 톤. 에펠탑의 무게야. 내가 에펠탑을 낳는 거라고!"

이케아에서 쇼핑하던 중 '아이를 갖자'라고 말하는 남자 때문에 당황한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지구 환경 전공의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여자는 인류의 3분의 2가 줄어야 지구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아이를 낳자는 남자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건 남자도 마찬가지. 하지만 두 사람은 수없이 싸우고 사랑하며 서로를 설득한다.

연극 '렁스'(Lung·연출 박소영)에서 남자와 여자 역을 맡은 성두섭, 이진희를 최근 서울 대학로 인근 카페에서 만났다. 재활용을 하고 장바구니를 사용하며 자전거를 타면서도 자동차를 운전하고 에어로졸 스프레이를 쓰고 아보카도를 수입해 먹으면서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남과 여'를 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렁스'의 부제는 '폐, 숨쉬다'이다. 영국 작가 던컨 맥밀란의 작품으로 2011년 워싱턴에서 첫 공연한 뒤 영국, 캐나다, 스위스, 벨기에, 필리핀, 홍콩 등에서 공연됐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신념 속에서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대화를 이어나가는 2인극이다.

"연극을 준비하면서 봤던 다큐멘터리에 이런 말이 나와요. '지구 좋아질 수 있어. 그런데 변수는 인간이야.' 나 같은 사람이 아이를 낳아도 되는지에 대해 여자가 고민하는 이유죠. 확신이 필요한 거예요. 아이를 낳으면 지구가 좋지 않아진다는 것을 너무 잘 알지만, 아이를 낳고 싶으니 예민하게 굴 수밖에 없는 거죠."(이진희)

"그래서 관객들이 작품을 보면서 생각이 많아질 거 같아요. '남과 여'가 보이는 이중성이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걱정도 했죠."(성두섭)

두 배우는 작품을 준비하고 무대에 오르면서 '렁스'의 '남과 여'에 스며들었다. '좋은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됐고, 불편한 지점이 많아졌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 같아요. 알게 될수록 마음이 불편해져요. 여자 캐릭터가 '알아버렸는데 어떡해?'하면서 실천하고 있잖아요. 이전에는 쓰레기는 아무 데나 버려선 안 된다는 정도로 인식했다면, 이젠 배달음식을 먹을 때도 일회용 용기를 주지 말라고 하고 평소에 텀블러를 쓰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까먹을 때도 많지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변화했다는 거죠."(성두섭)

"불편한 것들이 많아졌어요. 모르고 넘겼던 걸 다시 보게 되고 무심코 넘겼던 뉴스들을 이젠 주의 깊게 보고 있죠. 더 생각이 많아지는 거죠. 곽 티슈 안쪽에 있는 비닐을 분리해야 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됐어요. 실천하는 게 하나둘 늘어가고 있답니다."(이진희)

'렁스'의 여자는 임신 후 호르몬 변화로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인다. 남자는 회사 여직원과 키스를 한 사실을 털어놓는다. 지나치게 사적인 모습들은 '남과 여'의 민낯을 보는 것만 같다. 관객이 '렁스'가 공연되는 100분 동안 호흡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다. 남자가 여자에게 뜻밖의 고백을 할 땐 객석에서 탄식과 한숨 소리가 터져 나온다.

"어떤 것보다 현실적인 작품이에요. 이들이 나누는 대화와 순간의 감정은 아주 사실적이죠."(이진희)

"생각보다 사람들은 현실에서도 이성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 같아요. '남과 여'의 대사가 이성적으로 흘러가지 않는 것도 현실을 담아낸 거로 생각해요."(성두섭)

3m 남짓의 무대엔 어떠한 소품도 놓여있지 않다. 아주 기본적인 배경음악 외엔 음악도 나오지 않는다. 조명도 없어서 암전되는 순간도 거의 없다. 이 2인극은 무대장치, 조명, 의상 등을 최대한 절제한 상태에서 오롯이 두 배우의 감정과 호흡에만 의존한다. 대본엔 지문마저 없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자연스럽게 시간이 흘러간다. 그리고 무대 위엔 두 사람이 지나온 발자국을 상징하는 신발만 놓인다.

"처음엔 의자도 있었는데, 연습하다 보니 하나둘 빠졌어요. 처음엔 기댈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하다 보니 아무것도 없는 게 가장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연극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에요."(이진희)

"대본에도 쓰여있어요. '이 공연은 특별한 장치가 없고, 마임도 해선 안 된다'고요. 먹는 모습을 표현해서도 안 되는 거예요. '뭐 먹을래?'라고 던지면 그냥 먹은 것이 되는 거예요. 익숙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시공간이 마구 바뀌는 이 작품에 세트가 올라온다면, 한도 끝도 없을 거예요."(성두섭)

▲이진희와 성두섭은 '렁스'를 통해 지구 환경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실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현실적인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신태현 기자 holjjak@etoday.co.kr
▲이진희와 성두섭은 '렁스'를 통해 지구 환경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실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현실적인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신태현 기자 holjjak@etoday.co.kr

이들은 대본을 외우는 데 온 힘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이진희는 "대사에 치여 살았다"고도 말했다. 무대 전체를 한 호흡으로 돌아보는 '런스루'도 많이 돌았다. 이진희는 김동완, 이동하, 성두섭과 만나고, 성두섭은 이진희 곽선영과 호흡한다. 호흡이 중요한 작품이기 때문에 모든 배우와 맞춰보려면 쉴 수 없었다.

"동완 오빠는 무조건 들어주는 사람이에요. 오빠는 '내가 제일 멍청하지?'라고 말하기도 하죠. 여자에게 제일 많이 의지하는 것 같아요. 여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노력하려는 모습이 제일 많이 보이는 남자인 거죠. 동하는 잘 봐주는 사람이에요. 눈만 봐도 나를 사랑한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두섭이는 10년이 넘은 친구 사이예요. 시간이 주는 힘이 있어요. 똑같은 말을 해도, 내가 더 세게 해도, 이 사람은 다 알아줄 거란 믿음이 있어서 오래 만난 연인을 표현하기에 편하죠."(이진희)

"선영이는 특유의 언어가 있어요. 딱 부러지면서도 툭툭 끊는 게 여자 캐릭터와 잘 맞아요. 대본도 정말 빨리 외워서 신기했어요. 민폐 끼치지 않으려고 집중하게 됐죠. 진희 누나와는 연습할 때 너무 많이 웃어서 걱정이 되더라고요. 그만큼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입니다."(성두섭)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공연을 앞두고 두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남다르다. 두 배우는 "매번 특별한 것처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연이 끝날 때쯤 두 사람은 숲을 만들어요. 지금은 사라진 숲이지만요. 움직였던 사람들, 실천했던 사람들 같아요. 아직도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생각하는 중이에요."(이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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