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가기 전에 떠나기 전에

입력 2016-06-17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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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열흘쯤 전에 서초동에서 점심을 마시고(밥만 먹은 건 아니니까) 대방동에 있는 회사로 돌아올 때 택시를 탔다. 처음 보는 연푸른 택시였다. 기사에게 “이거 뭔 택시유?” 하고 물었더니 최근 20대밖에 안 나온 전기차라고 했다.

전기차, 대기오염 그런 것에 대해 몇 마디 주고받는데 그가 담배 피우는 고충을 이야기하기에 “나는 단칼에 끊었다”고 했다. “담배 끊는 놈, 이혼하는 놈, 쿠데타하는 놈은 원래 상종도 하지 못할 독종이다. 그러나 난 독종은 아니다. 알고 보니 세 가지를 다 한 사람은 박정희더라”, 그런 말도 했다(이거 다 맞나?).

그러자 산 도둑놈 같아 보이는(백미러에 비친 모습으로 미루어) 기사는 기다렸다는 듯 이혼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몇 년 전에 이혼한 뒤, 아들을 장가보내고 딸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그가 딱 걸린 이혼 사유는 많았다. 1)담배를 끊는다 2)술 취해서 해롱거리지 않는다 3)화장실에서 잠자지 않는다 4)일찍 귀가한다 5)처갓집 흉을 보지 않는다, 이상 다섯 가지를 각서로 써서 맹세했는데, 하나도 준수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떻게 그런 각서까지 썼나 싶어 “아니, 왜 화장실에서 잔대요?” 하고 물었더니 술 취해 변기에 앉아서 자주 잤다고 그랬다. 쉽게 말해 똥을 싸다가 그대로 잠들었다는 건데, 밑을 닦아주고, 일으켜 세워서, 아랫도리를 입히고, 질질 끌어서 재우는 아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백 번 천 번 이혼당해도 싸지.

그런데 그는 자기도 잘못했지만 아내, 그러니까 전처, 다시 말하면 그년도 잘못이 있다고 주장했다. 처남과 짜고 자기를 죽이려 한 일도 있었다는 것이다. 처남이 누나에게 집 전화로 보낸 공모 메시지인가 음성인가를 자기 휴대폰에 옮겨 저장했다던데, 이혼소송에서 이걸 딱 증거로 제시해 위자료치고는 싸게 1억 원을 주라는 판결을 받고, 땅을 저당 잡혀 그 돈을 주고 헤어졌다는 것이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그는 “이혼하고 보니 홀가분하더라”, “밥은 사 먹으면 그만인데 살림하는 데 불편한 게 많더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년은 다시 안 봐도 그만이라고 했다. “택시 운전사가 어떻게 항상 집에 일찍 들어가나, 각서를 쓰라고 한 것은 음모였다”는 주장도 했다. 그런데 왜 각서까지 써 주었느냐고 했더니 평소에 지은 죄가 많기 때문이라고 그랬다.

곡조가 좀 슬퍼지는 것 같기에 장난기가 도져 “혹시 ‘가기 전에 떠나기 전에’ 이런 노래 아느냐?”고 물었다.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으로 시작되는 ‘이별의 부산정거장’의 개사곡이다. 내가 어릴 때 고향 청년들이 자주 불렀다. “가기 전에 떠나기 전에 내가 사준 반지 내놔라. 육시랄 년, 베락 맞을 년”, 이러고 난 뒤에 “몸부림치는 새끼 그냥 두고 가야 옳으냐. 평생을 빌어먹어라”라고 끝나는 노래다. 처음 듣는다고 했다.

노래를 알려주는 동안 택시는 회사 앞에 도착했다. 그냥 내리기가 왠지 거시기해서 점심에 마시지 않고 남긴 와인 한 병(선배가 준 것)을 건넸더니 그는 “큰 선물 받았네. 아껴서 마셔야지” 그러면서 좋아했다. 차에서 내려 걸어가다가 뒤돌아보니 택시는 그대로 서 있었다. 그 엉터리 가사를 적고 있는 것 같았다.

이 글의 결론: 생판 남인 사람에게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하면 갑자기 술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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