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세상풍경] 커피를 처음 만난 날

입력 2016-05-13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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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그게 언제였을까. 살다 보면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가슴에 무늬처럼, 또는 상처받은 옹이처럼 잊을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기쁜 일이거나 슬픈 일이거나 특별한 일들만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세월 속에 빛이 바래 이제는 옆에 선 사람이 누군지도 잘 구분할 수 없는 흑백사진처럼 형체조차 희미한 기억도 어제의 일같이 새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 나는 열한 살,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운동장 조회를 하는 날이면 우리는 ‘에 또…, 에 또…’ 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들어야 했다. 어떤 아이는 그게 지겨워 신고 있는 고무신 뒤꿈치로 방귀소리를 뿡뿡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뒤에 서 있는 아이들이나 그러지, 앞에 선 키 작은 아이들은 꼼짝없이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여름이 가까워 오면서 그냥 픽픽 쓰러지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면 놀랄 만한데도 선생님이 그 아이를 번쩍 안아 그늘로 데려가 눕히고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래도 교장선생님의 훈화는 짧아질 줄 몰랐다. ‘에 또…마지막으로’를 두 번쯤 해야만 끝이 났다.

그런 조회를 마치고 교실로 들어갈 때는 어김없이 맹호부대 노래를 부르며 운동장을 한 바퀴 행진했다.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다.’ 마지막 ‘한결같은 겨레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다’는 두 번 반복했다.

우리 반 길주네 큰형이 월남에 갔다. 맹호부대 용사였다. 그때 우리가 월남에 대해서 가장 궁금해했던 것은 바나나였다. 대체 그것은 어떤 나무에서 열릴까. 우리 집 울밑에도 커다란 파초가 서 있었다. 그게 더 크게 자라 거기에서 바나나가 열린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것 같지 않았다. 파초와 바나나라니. 믿을 수 없었다.

어떤 해 여름 긴 장마와 땅을 완전히 녹여버릴 듯한 무더위 끝에 파초에서 꽃이 피고 거기에 아기손가락 같은 열매 몇 개 달리다 흐지부지되는 건 보았지만 그건 그거고 바나나는 바나나였다. 그는 길주 형이 월남에서 돌아오며 바나나라도 가져올 줄 알았는데, 그것은 보름 가까이 배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 보관이 힘들어 가져올 수 없다고 했다.

대신 길주가 자기 형이 월남에서 가져온 것 중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국방색 봉지 몇 개를 친구들 앞에 공중에 휙 뿌려 나누어 주었다. 룰은 누구나 오직 하나씩만 주울 수 있는데, 이게 완전히 복불복이었다. 운이 좋으면 작은 국방색 봉지 안에 눈처럼 흰 설탕이 차례 왔고, 운이 나쁘면 쓰고 텁텁한, 생긴 것과 냄새도 꼭 나무껍질을 바싹 태워 갈아놓은 것 같은 가루가 차례 왔다.

우리는 약처럼 쓴 가루가 무엇인지 몰랐다. 선생님이 그게 바로 ‘카피’라고 알려주었는데, 말하자면 미군들에게 보급되던 인스턴트 커피였던 것이다. 커피와 설탕이 한데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다른 봉지에 들어 있었다. 아이들은 그게 뜨거운 물에 타 마시는 건지도 몰랐다. 그냥 미국 사람들은 이런 걸 왜 먹는지 참 알 수 없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짧은 글 하나를 쓰는데도 꼭 한 잔의 커피를 마셔야 글이 써진다. 그러지 않고는 도무지 글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의 인생은 기쁨과 슬픔 속으로도 흐르지만 이렇게 오랜 추억의 커피 속으로도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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