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세상풍경] 오랜 기억 속의 아름다운 선물들

입력 2015-12-04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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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 소설가

누구나 한 해를 보내며 마음 안에 고마운 분들이 있다. 어느 해엔 인생에서 아주 큰 도움을 받은 분이 있기도 하고, 두고두고 잊지 못할 은혜와 가르침을 받은 분이 있기도 하다. 설날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에도 선물을 보내기도 하지만,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쯤 그런 분들에게 감사 선물을 보내기도 한다.

그런데 예전 어느 한때는 선물을 준비하는 나에게도 부담이 되고, 또 받는 분에게도 부담이 되게 조금은 과하게 선물했던 적도 있었다. 또 그렇게 선물해야 무얼 제대로 선물한 느낌이 들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돌아보니 그런 선물이야말로 마음이 서로 불편하다. 젊어서 잘 몰랐다.

지금도 내 기억 속에 가장 아름답게 남아 있는 선물은 어린 시절 보았던 할아버지의 ‘종이 선물’이다. 온 산의 나무들의 잎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는 바로 지금과 같은 겨울 초입의 일이다. 노새가 끄는 작은 수레가 딸랑딸랑 워낭소리를 울리며 우리 집으로 온다. 빈 수레를 끌고 온 사람은 나이 쉰쯤 되어 보이는 창호지를 만드는 종이 공장의 아저씨다. 우리는 그 아저씨를 ‘조우(종이) 아저씨’라고 불렀다. 아저씨는 우리 집 닥나무 숲의 닥을 베어 수레에 싣는다.

조우 아저씨는 닥나무를 베어간 다음 한 달 반쯤 지나 음력설이 보름가량 앞으로 다가올 즈음 다시 우리 집에 온다. 이때엔 두루마리로 둘둘 만 창호지 뭉치를 가지고 온다. 우리 집의 닥나무를 베어간 다음 그걸로 종이를 만들어 그중 일부를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어린 시절엔 닥나무 숲이 저절로 생긴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냥 생긴 숲이 아니다. 할아버지가 젊은 시절 이 산 저 산에 퍼져 있는 닥나무를 한곳으로 파 옮겨 닥나무 숲을 만들었던 것이다. 집에서 종이를 직접 만들 수 없으니 원료가 되는 닥나무를 심어 공장에 보내 그걸로 집에서 쓰는 한지를 자급자족했던 것이다.

그렇게 조우 아저씨가 창호지 뭉치를 가져오면 할아버지가 이웃집 한 집 한 집을 떠올리며, 또 그 집에 문이 대략 몇 개인지 어림 계산해 창호지 뭉치를 나누신다. 묵은해가 가고 새해가 다가오는데 새로 문을 바르라는 뜻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이웃집에 종이를 나누고 또 가까운 대소가에 종이를 나누었다. 그 심부름을 손자들이 도시의 신문배달원처럼 옆구리에 창호지를 끼고 다니며 했다.

그러면 며칠 후 종이를 보낸 것에 대한 답례품이 왔다. 꼭 종이를 보낸 것에 대한 답례품이라기보다 한 동네에 살며 한 해 동안 이런저런 보살핌을 받은 것에 대해 잘 다듬어 손질한 오죽 담뱃대를 보내오기도 하고, 지난 가을에 잡은 토끼의 털로 만든 토시를 만들어 보내기도 하고, 잘 고은 수수엿을 보내기도 하고, 형편이 어려운 집 같으면 표면에 살얼음이 살짝 낀 연시를 보내오기도 했다.

한 해를 정리하는 이 계절만 되면 나는 늘 그때 그 시절의 일이 떠오르곤 한다. 어린 시절엔 어떤 것이 마음으로 주고받는 선물인지 바르게 보고 자랐으면서도 어른이 되어서는 선물의 가격이 곧 선물의 정성을 대신하는 부담스러운 일을 겪기도 하고 행하기도 한다. 백화점 선물 코너에 가득 쌓여 있는 이런저런 상품들을 보며, 문득 어린 시절의 일을 다시 떠올려보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서도 한 해의 존경과 감사가 닥나무 숲에서 종이가 오고가는 것처럼 아름답게 오고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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