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숙태후(思肅太后) 이씨(생몰년 미상)는 고려 선종의 제2비이다. 지금의 인천광역시 출신으로 아버지는 이석, 할아버지는 이자연이다. 선종에게는 왕비가 세 명 있었는데, 셋 다 이자연의 손녀이다. 또한 시어머니라 할 수 있는 문종의 왕비 세 명은 모두 이자연의 딸로서 사숙태후의 고모들이다. 즉 사숙태후는 인주 이씨의 번성이 한창이던 시절 왕비가 되었다 할 수
인예순덕태후(仁睿順德太后) 이씨(?~1092)는 고려 문종의 제2비이다. 지금의 인천광역시 출신으로 아버지는 중서령 이자연, 어머니는 평장사 김인위의 딸이다. 문종의 제3비 인경현비(仁敬賢妃), 제4비 인절현비(仁節賢妃)가 모두 자매이다. 과거에 급제한 평범한 문신인 이자연이 딸을 세 명이나 납비(納妃)할 수 있었던 것은 당대 제일의 세도가라 할 수 있는
선정왕후(宣正王后) 유(劉)씨(생몰년 미상)는 목종의 제1비이다. 친아버지는 종친인 홍덕원군(弘德院君) 왕규(王圭), 양아버지는 성종이다. 어머니 문덕왕후(文德王后)가 처음 홍덕원군과 혼인했고, 뒤에 성종과 재혼하였다. 재혼녀가 왕비가 되었다는 점은 매우 놀랍다. 조선시대 영조는 과부와 혼인할 수 없어 66세에 15세의 정순왕후와 혼인하지 않았던가! 이는
효녀 지은(知恩)은 신라 51대 왕 진성여왕(재위 887∼897) 대의 여성이다. 효녀 지은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사기’ 열전과 ‘삼국유사’ 효선편에 실려 있다. 나이와 품팔이를 한 삯 등의 세부적인 사실은 다르나 이야기의 중심인물과 구성은 동일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효녀 지은은 한기부의 백성 연권(連權)의 딸이었는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생
설씨녀(薛氏女)는 신라 26대 왕 진평왕(재위 579∼632) 대의 평민이다. 설씨녀의 집은 경주의 율리(栗里)에 있었고, 가난하고 외로웠다고 한다. 설씨녀는 설씨의 딸이라는 의미이다. 설씨녀는 용모가 단정하고, 뜻과 행실이 바른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주변 사람들이 설씨녀의 고운 외모를 흠모하였으나 감히 가까이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설씨녀의 아버지
사택왕후는 백제 30대 왕 무왕(재위 600∼641년)의 왕후이고, 백제 귀족인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이다. 사택왕후는 2009년 1월 익산 미륵사지 석탑을 보수, 정비할 때 세상에 나타났다. 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미륵사’라는 절의 창건 주체·시기·내력을 증언하는 유물인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가 발굴되었다.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굴되기 전
선화공주는 신라 26대 왕 진평왕(재위 579∼632)의 셋째 딸이다. 선화공주의 첫째언니는 선덕여왕으로 즉위하는 덕만공주이고, 둘째언니는 김용춘과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는 김춘추를 낳은 천명공주이다. 신라의 선화공주가 백제의 서동에게 시집을 간 일화가 ‘삼국유사’에 ‘서동요’와 함께 전해진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얼마나 아름답던지 신라를
평강공주는 고구려 25대 평원왕(재위 559~590년)의 딸이다. 평원왕은 평강왕이라고도 하였는데, 평강공주라는 이름은 평강왕의 딸이라는 점에서 유래된 것이다.
평강공주의 남편은 온달이다. 외모가 볼품이 없고 가난했으며 재주 또한 없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사람들의 놀림에도 불구하고 구김 없이 밝은 마음씨와 밥을 얻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하는 극진한 효심뿐이었
황진이는 개성 출신 기녀로 이름은 ‘진’ 또는 ‘진이’이며, 기생 이름은 ‘명월’이다. 중종(재위 1506~1544) 연간 사람으로 개성에 살던 소경의 딸 또는 황(黃) 진사의 서녀로 알려져 있다. 기생이 된 배경도 자세하지 않다. 옆집에 살던 한 서생이 그녀를 몹시 짝사랑하다 죽자 스스로 기생이 되었다고 전할 뿐이다.
화담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세조의 며느리, 덕종(의경세자)의 아내, 성종의 어머니, 폐비 윤씨의 시어머니, 연산군의 할머니. 이렇듯 복잡한 수식어가 붙는 주인공은 소혜왕후 한씨(1437~1504), 곧 인수대비다.
소혜왕후 집안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만큼 정치적 위세가 대단했다. 아버지 한확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를 때 적극 가담해 공신이 되었다. 더욱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992)는 고려 경종의 제4비이자 제8대 왕 현종의 어머니이다. 그녀의 삶은 언니인 헌애왕태후(천추태후, 경종의 제3비)의 삶과 분리해 말할 수 없다. 두 자매는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동지이자 라이벌로서의 극적인 삶을 살았다.
981년 경종이 죽었다. 경종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왕송(뒤의 목종)은 젖먹이라 왕위를 계승할 수
함북 명천에서 출생한 허정숙(1902~1991)은 1818년 배화여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고베(神戶)신학교 관서학원에 잠시 다녔다. 1920년 중국 상하이의 외국어학교 유학 중 임원근, 박헌영 등 사회주의자와 교류하다 1924년 임원근과 결혼해 첫아들도 출산하였다.
변호사인 아버지 허헌을 존경하며 온갖 보살핌 속에 잘 자란 그였지만, 어려서부터 남녀 불평
여걸 정종명(1895~?)은 우선 겉보기보다 더 서글서글하고 동정심이 넘쳐나는 넉넉한 마음의 전문직 산파(조산원)였다. 뜻을 같이한 첫 남편 신철과 이혼한 후 다른 운동가와도 재혼하였으나 신철이 아플 때는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그런 여성이었다. 운동가들의 옥바라지도 도맡아 하여 큰누님처럼, 어머니처럼 보살핌으로써 ‘운동계의 대모’라 불렸다. 옥중에서까지 출
오광심(1910~1976)은 평안북도 선천군 신부면에서 1910년 3월 출생하여,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남만주로 갔다. 정의부(正義府)가 설립한 화흥중학 부설 사범과를 1929년에 졸업하고, 이듬해 한족회의 배달학교와 유하현 삼원보의 동명중학 부설 여자초등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대일 항전이 본격화할 무렵 그는 조선혁명당에 가입하였고, 1931년 일제
영화 ‘암살’의 주인공처럼 알려지기도 한 박차정(1910~1944)! 그는 1910년 5월 8일 경남 동래에서 3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제의 무단정치에 비분강개하여 1918년 1월 자결했다. 어머니는 화북조선독립동맹 위원장 김두봉과 사촌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오빠들도 모두 항일 투쟁에 참여한 이 집안은 1918년에 설립된 동래
1929년 세계적 경제 공황 속에 고무공업계 역시 불황의 바람이 일고 있었다. 1930년 당시 주로 기혼 여성들이 일하던 고무공장, 고무신 공장의 노동조건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다시피 하여 공장에 나온 여공들의 작업은 말 그대로 피땀을 흘려야 하였다. 갓난아기에게 젖을 물리며 작업을 하는 여
오늘날 경기도 의정부시 금오동에는 ‘족두리 묘’로 불리는 의순공주(義順公主, 1635~1662)의 묘가 있다. 1650년(효종 1) 청으로 끌려간 의순공주는, 조선 왕실의 마지막 공녀(貢女)라 할 수 있다. 의순공주는 왕실 후손이긴 하나 진짜 공주는 아니었다.
의순공주는 본관이 전주, 이름은 애숙이다. 성종의 4대손인 아버지 이개윤은 서자 출신이다.
“이 책을 이리 눈이 어두운 데 간신히 썼으니 이 뜻 잘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이 책을 베껴가되 가져갈 생각 말며, 부디 상하지 말게 간수해 쉬 떨어버리지 말라.”
이 글은 안동 장씨(安東張氏, 1598~1680)가 남긴 당부의 말로 ‘음식디미방’ 끝부분에 나온다. 장씨가 ‘음식디미방’을 지은 시기는 일흔셋 무렵이었다. 노년에 완성한 요리책이
박어우동(朴於宇同, ?~1480)은 오늘날 ‘자유부인’의 표상이다. 여러 차례 영화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큰 관심을 받는 여성이다. 15세기 중반 양반인 아버지 박윤창과 어머니 정씨(鄭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남편은 효령대군의 손자인 태강수 이동이었다. 즉, 어우동은 양반 집안 출신으로, 왕실 종친을 남편으로 둔 지체 높은 여성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밖에
헌애왕태후 황보씨(964~1029)는 경종의 제3비이다. 왕이 죽은 뒤 천추전에 거처했다고 하여, 흔히 천추태후(千秋太后)라고 불린다. 아버지는 태조의 아들인 대종(戴宗), 어머니도 역시 태조의 딸인 선의왕후이다. 동성혼을 피하기 위해 할머니 신정왕태후의 성씨인 황보씨를 칭하였다.
980년 경종의 유일한 아들을 낳았으나, 몇 개월 뒤 남편인 경종이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