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전 주석은 톈안먼 사태 당시 상하이시 당서기로 재직 중이었다가 덩샤오핑의 부름을 받고 베이징에 긴급 호출돼 공산당 총서기로 발탁됐다. 톈안먼 광장에서 학생 시위대에 동조한 후 숙청된 자오쯔양을 대신해 시위를 강경 진압하면서 일약 중국의 지도자로 떠오른 것이다.
1989년부터 2002년까지 장 전 주석이 당 총서기로 재임하는 동안 중국 경제는 3배 이상...
중화제국 부활을 꿈꾸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절대권력의 폐해를 경험한 덩샤오핑이 이를 막기 위해 구축한 집단지도체제를 뭉개고 1인 천하의 길을 열었다. 내부 불만이 없지 않다. 중국 통일을 달성한 마오쩌둥, 경제발전을 이룩한 덩샤오핑과 같은 반열에 오를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시 주석이 ‘스펙’을 쌓는 길은 단 하나, 대만 ‘수복’이다. 양안 통일은...
더욱이 그는 덩샤오핑이 직접 차차기 후계자로 지명했던 인물이다. 공자의 나라에서 강호의 도가 땅에 떨어졌다.
장기집권의 시대가 열리면서 시진핑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이라는 건국의 영웅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 지난 10년간 어떤 업적이 있었기에 공산당은 그에게 영원히 국운을 맡겼을까. 마오쩌둥의 최대 업적은 혼돈의 대륙을 정리하고, 중국이라는 새로운...
앞서 2017년 열린 직전 19차 당 대회 때는 당장에 '시진핑 신시대중국특색사회주의 사상'이 마르크스레닌 주의, 마오쩌둥 사상, 덩샤오핑 이론, 3개 대표 중요사상(장쩌민), 과학발전관(후진타오)과 더불어, 당의 행동 지침 중 하나로 명기된 바 있다.
이런 가운데 시진핑 주석은 폐막 연설에서 "당 중앙의 권위와 집중통일영도를 수호하고 정치 규율과 정치 규칙을...
특히 시진핑 신시대 중국의 특색 있는 사회주의 사상은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함께 국가 지도자의 이름을 당헌에 새김으로써 지도자의 지위를 높이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이번 회의에선 긴 이름의 사상을 ‘시진핑 사상’으로 압축해 기존의 마오쩌둥 사상과 동급으로 만드는 방안도 논의될 것으로 전해진다.
닛케이는 “당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는 것은 시 주석...
지난해는 역사결의를 채택해 자신을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같은 반열에 올렸다.
이렇게 자신의 권력 강화에만 몰두하면서 중국 경제와 사회는 멍들어갔다. 중국 경제를 세계 2위로 끌어올렸던 고속 성장의 활력은 사라졌다. 시진핑이 집권하기 전 10% 선이 깨져도 호들갑을 떨던 중국 경제성장률에 대해서는 올해 3%도 안 될 것이라는 비관적 관측이 팽배하다....
그러나 이런 자화자찬에도 시 주석이 중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이나 개혁개방의 아버지 덩샤오핑과 견주기에는 그 업적이 매우 부족한 편이다. 심지어 시 주석은 고속성장으로 중국을 주요 2개국(G2)으로 끌어올린 장쩌민과 후진타오에 비해서도 초라하기 그지없는 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한때 10% 이상의 고성장을 누리던 중국 경제는 경기둔화의 수렁에서 헤어 나오지...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처럼 국민 평안을 키우고, 경제를 성장시키며 불평등과 불공정을 완화할 수 있다면 어느 쪽 인재라도 과감히 포용해야 한다. 인재 통합을 이룬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취임식 이전까지 새로운 정책을 짜야 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에 따른 유가 폭등, 원자재 부족, 공급망 혼돈, 각국 중앙은행의 긴축 기조 등 국민경제 안위를...
선전은 덩샤오핑이 설계한 개혁개방의 인큐베이터로 중국 경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도시로, 화웨이와 텐센트(텅쉰)를 비롯한 각종 IT기업이 몰려있어 중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린다. 또한, 주요 항구 도시 중 한 곳으로도 손꼽힌다.
애플 아이폰을 위탁생산하는 훙하이의 가장 큰 조립 공장도 선전에 있는데 훙하이는 이 지역 공장 가동을 중단하기로 했다. 회사는 폐쇄...
첫 번째는 1978년 4대 경제특구(선전, 주하이, 산토우, 샤먼)의 대외개방으로 시작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이었고, 두 번째는 2001년 11월 10일 WTO 가입이었다. 비록 그 과정은 힘들었지만 결국 중국도 원했고 미국도 원해서 이루어진 합작품이었다.
사실 중국의 WTO 가입은 매우 길고 험난한 여정이었다. 중국은 1986년 7월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재가입...
중국은 1978년 이후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과 ‘선부론’을 기치로 시장경제를 흉내 냈다. 배리 노턴 캘리포니아대학 경제학 교수는 “1998년부터 2005년까지 중국 정부의 직접 개입은 축소돼 제로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당시 중국이 한국, 일본, 대만처럼 성장 일변도를 구가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균열은 2006년 공산당이 경제 발전을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그리고 덩샤오핑이 문화대혁명과 인민공사 그리고 대약진운동이라는 극단적인 인위적 장벽을 걷어내고 붙잡은 것도 바로 불굴의 의지로 생산과 교역에 매진한 대중들의 자발성이었다. 상공업을 극도로 억압함으로써 중국의 정체를 초래한 원인(遠因)을 제공했던 명나라 시기, 그 억압 체제에서 끈질기게 경제의 불씨를 살려 번영시켜 냈던 것도 민간 대중들이었다....
덩샤오핑과 장쩌민, 후진타오 등 3대에 걸친 시장화 노선 속에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그만큼 내 집 마련이 힘들게 된 서민의 불만이 고조되자 시진핑이 라이벌의 정책마저 따를 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된 것이다.
주택정책의 변화에 따라 민간 부동산개발업체들도 노선 전환을 강요받는다. 민간 아파트 분양 사업은 향후 크게 축소돼 업체들이 본업 이외 다른 사업...
마오쩌둥은 1945년, 덩샤오핑은 1981년 역사결의를 통해 정치적 지위와 입지를 공고히 했다. 시진핑의 세 번째 역사결의는 신중국을 세운 마오쩌둥,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발전을 선도한 덩샤오핑과 동급의 위치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진핑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당 중앙’이라는 말은 이제 어디서나 쉽게 들을 수 있는 관용적인 표현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시 주석의 이름은 총 22번 언급됐고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은 각각 18번, 6번 나왔다. 전임자 후진타오는 단 한 번 거론됐다.
공개된 전문에는 역사결의 중 처음으로 톈안먼 사태에 대한 평가도 담겼다. 결의안은 톈안먼이라는 직접적인 언급 대신 ‘1989년 일어난 심각한 정치적 소란’이라고 언급하며 “공산당은 소란으로부터 인민의 기본적 이익을 수호했다”고...
두번째는 덩샤오핑이 1981년 주도했다. 마오를 ‘위대한 마르크스주의자,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이자 전략가’로 평가하면서도, 문화대혁명의 과오를 비판하고 그의 우상화를 부정했다. 덩 또한 1997년 사망하기까지 최고지도자의 확고한 권력으로 개혁과 개방을 이끌었다.
이번 3차 결의는 ‘시 주석=당의 핵심’임과 ‘시진핑 사상’을 집중적으로 강조했다. 중공은...
그러나 지도자들은 사태를 봉합하는 데 급급했다. 후진타오 전 주석은 시스템 개혁 대신 ‘조화로운 사회’를 기치로 사회동요를 잠재우는 길을 택했다. 자신을 마오쩌둥·덩샤오핑 반열에 올려 장기집권의 길을 닦고 있는 시 주석이 ‘공동부유’를 앞세워 민심을 달래는 모습도 전임자인 후 전 주석과 묘하게 닮았다.
40년 만의 첫 역사결의로 시진핑 장기집권 명분 쌓아역사결의했던 마오쩌둥·덩샤오핑, 죽을 때까지 전권 장악중국,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 강조전 세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대립구도 진입 가능성
중국 공산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마오쩌둥 반열에 올리는 역사결의를 채택했다. 이를 통해 3연임을 넘어 종신 집권의 길을 터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11일...
내년 당대회 앞두고 ‘역사 결의’
장기집권에 대한 명분 쌓기 나설듯
마오쩌둥·덩샤오핑 이어 3대 영도자 반열 오르는 의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장기집권을 위한 ‘역사적 명분 쌓기’에 나선다.
7일 홍콩 영자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 공산당이 8일부터 11일까지 나흘 일정으로 베이징에서 제19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19기 6중전회)를...
홍콩 명보는 산당 100년사를 3단계로 분류해 시 주석을 마오쩌둥, 덩샤오핑 시대에 이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제3대 영도자의 반열에 올리는 내용일 것으로 전망했다.
이번 역사 결의에서 시진핑 시대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도 관심거리다. 덩샤오핑이 '사회주의 시장경제' 색깔을 정립했다면 시진핑은 최근 '공동부유' 정책을 펼치고는 있지만 나라 안팎으로 우려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