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論]기술이 경영을 묶어서는 안된다

입력 2013-12-0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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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 연세대학교 경제대학원 특임교수ㆍ프리덤팩토리 대표이사

스마트폰이나 반도체는 매우 정교한 전자제품이다. 상당한 수준의 과학자나 엔지니어가 아니면 양자역학의 원리까지 이용하는 전자제품들의 제조법을 이해하기 힘들다. 삼성전자 같은 기업에 엔지니어나 과학자 출신의 고위 임원들이 많은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재미있는 것은 삼성전자의 최고 의사결정자는 그 과학자, 엔지니어들이 아니고 이건희 회장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전자제품 생산능력을 가진 자연과학자나 엔지니어가 아니다. 물론 이 회장도 과학이나 엔지니어링에 상당한 조예를 가지고 있다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경영자다. 인재를 뽑아서 그들에게 임무를 주고 어디에 투자할지를 결정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 경영자가 수많은 과학자들 위에서 의사결정을 했고, 그것이 삼성전자를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으로 만들어낸 비결이었다.

경영자가 엔지니어들 위에 있기로는 현대자동차도 마찬가지다. 현장에서 차를 만드는 사람은 엔지니어들, 근로자들이지만 그들을 뽑아서 일감을 주고 급여를 결정하며 어떤 차종을 생산할지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은 경영자 정몽구 회장이었다.

이건희나 정몽구 같은 경영자가 아니라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엔지니어가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를 경영했더라도 지금처럼 세계적 기업이 되었을까? 그리 가능성 높아 보이지 않는다.

필자가 너무도 당연한 이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생산을 담당하는 엔지니어 또는 기술자가 경영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병의원은 그 중의 하나다. 우리나라의 의료 관련법은 기본적으로 의사 이외의 자가 병원 경영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전제 위에 세워져 있다. UD치과 같은 네트워크 치과를 금지하는 법은 아예 한 의사의 병원에 다른 의사가 관여하는 것조차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참 안타까운 규제다. 병원을 경영하는 데에는 의학지식과 의술뿐만 아니라 경영 일반에 관한 노하우를 많이 필요로 한다. 간호사를 뽑고, 훈련시키는 일, 자신의 병원에 맞는 환자를 선별하는 일, 앞으로의 추세 변화를 반영해서 투자의 방향을 바꾸는 일 등은 모두 일반적인 경영에 속한다. 의사가 그런 일을 잘 할 거라는 보장이 없다. 어쩌면 의술이 뛰어난 의사일수록 그런 일들에는 관심이 없거나 또는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가 아니더라도 경영을 잘 하는 사람들이 의사와 같이 일할 수 있다면 병원의 경영은 훨씬 효율적이 될 것이고 환자들에게도 좋을 것이다. 또는 의사가 아닌 사람이 병의원을 세운 후 의사를 고용해서 운영한다면 더 좋은 병의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병원이 시원찮다면 환자들이 외면하면 그만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의료법은 의사가 아닌 사람이 경영자가 되는 일을 매우 어렵게 만들어놨다.

이런 사정은 우리가 소위 서비스업이라고 부르는 거의 모든 분야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학교는 교사자격증을 가진 사람만이 경영해야 한다. 약국은 약사만이 해야 하고, 안경원은 안경사만이, 또 농업 기업은 농민이 대부분 차지해야 한다. 왜 그래야 하나? 기업의 CEO들 중에는 교사보다 학교를 훨씬 더 잘 운영할 수 있는 사람, 의사들보다 병원을 더 잘 경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런 규제들은 만들기만 하면 팔리는 시절, 물자가 부족하던 지극히 전근대적인 시절의 기억에 기초한 제도이다. 그러나 이제는 만드는 것보다 파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다. 또 조직 구성원들에게 근로의욕을 북돋워 신나게 일하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해진 시대다. 그런 노하우는 의사 자격증이나 교사 자격증 같은 것으로 습득될 수 없다. 시장에서의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습득되는 것이 경영노하우와 기업가정신이다.

한국 경제가 발전하려면 의료나 교육, 농업, 공공부문 등 지금 낙후된 분야의 생산성을 제조업이나 건설업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자면 기술자들만이 경영자가 될 수 있다는 규제들을 걷어내고, 경영자와 기술자들이 협업을 할 수 있게 의식과 제도를 바꿔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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