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 고미령 한양대병원 이비인후과 청각사“종이거북이는 희망을 싣고”

입력 2012-11-15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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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출근시간에 맞춰 검사실 문을 열고, 검사를 하고, 오후 다섯시가 지나면 수위아저씨의 복도 등을 끄는 소리에 맞춰 퇴근 준비를 하는 무료한 일상의 반복이라 생각했다.

새 달이 시작되는 달력을 넘길 때마다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월급날까지 과연 얼마의 공휴일과 휴가를 쓸 수 있는 지를 세어 보는 일이었고, 어쩌다 황금같은 공휴일이 주말과 겹쳐지는 날이라도 발견할 때면, 마음이 무거워지기까지 했다. 일에 대한 진정한 열정 없이 반복하던 일과는 급기야 갖가지 질병으로 몸을 고단하게 만들었고, 정신적으로도 나 자신을 지탱할 수 없을 만큼 지쳐가게 했다. 바로 그 시기에 만나게 된 환아가 있었다.

항암치료를 받느라 이미 시력을 잃고, 점점 약해져 가는 청력을 검사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나와 만나게 된 아이였다. 앞을 볼 수 없었기에, 나와의 첫 대면을 아쉬워했던 아이는, 검사를 마친 후 나에게 선물을 주겠다고 하면서 받아든 이면지를 접어 나에게 종이거북이를 접어주었다. 아이의 감겨진 눈은 허공을 향하고 있었지만, 야물게 균형을 잡은 두 손은 이미 접는 순서를 기억하고 있음은 물론이고, 벌어진 틈새와 여분을 정확히 계산하여 얼마 뒤, 종이거북이를 탄생시켰다.

내가 눈을 뜨고 접었던 종이학보다도 더 정교한 접이능력이 필요로 하는 과정이었다. 치료를 하다가 시력을 잃게 되었지만, 11살 아이는 자신에게 느닷없이 다가온 불행한 환경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잠시의 시간도 허투루 살지 않았다. 손이 건재하는 한 종이접기를 시작한 아이는, 그렇게 대면할 수 없었던 친구와 선생님, 새로운 사람들에게 자신이 열심히 연습해온 작품을 선물로 나눠주었다고 했다.

아이가 선물로 주고 간 검사실 책상위의 종이거북이를 보고 있노라니,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었던 아이의 삶이 거울이 되어 나의 불성실했던 삶을 부끄럽게 투영하고 있었다. 문득 검사실을 지나치는 많은 환자들을 상대했던 나의 모습을 떠올려봤다. 비록, 전문성은 있을지 몰라도 나는 아픈 환자들에게 미소로 위로 조차 건네지 못하는 참으로 투박하고 차가운 선생님이었다. 종이거북이를 접어준 아이를 생각하며, 희망을 떠올려보기로 마음먹었다.

두려움과 무서움이 많은 어린 친구들에겐 유치원 선생님이나 친한 언니, 누나처럼 다가가 검사를 했고, 연세 많은 어르신들께는 손자, 손녀처럼 따뜻하고 정감어린 손길로 다가가 검사를 해드렸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알 수 없는 ‘난청’ 이란 질병에 당황하고, 때론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였던 많은 환자들에겐 한없는 위로와 호전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심어주면서 그분들의 마음까지 보듬는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

검사를 받으러 온 환자들을, 그저 정형화된 스탬프를 찍어주는 것처럼, 검사를 마치면 내보내고, 결과를 내며 마무리 했던 나날들은 사라지고, 이제 그분들이 두려움을 갖지 않고 편안히 검사를 받으며 치료 또한 순탄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드리며 병원 문을 나서게 하는 것이 나의 소중한 작업이 되었다. 난청이 호전되지 않자 영영 귀머거리가 될 것 같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한 아주머니는 내 어깨에 기대어 한참을 울기도 하셨는데, 그때 나는, 이미 검사를 마친 것으로 내 소임은 모두 끝난 상황었지만, 나는 그분의 눈물을 닦아드리고, 따뜻하게 손을 잡아드리기도 하면서 진정될 수 있는 시간까지 기다려주었다. 퇴근시간이 훌쩍 지나 만원버스에 시달려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나의 위로를 통해 안정을 되찾은 환자분을 떠올리니 나의 불편함은 별 문제도 되지 않는 듯 했다.

마음속에 품었던 희망과 사랑이 진정 꿈을 만들어 주었던 걸까.

때론 쉽게 낫지 못하는 난청도 우연히 회복되어지는 기적으로 만날 수 있었다.

환자들을 위해 더 많은 수고로움을 겪는 듯 했지만, 나의 일터는 더욱 신바람나고 신명나는 활력이 넘치는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힘없고 연약한 사람들을 마음으로 일으켜 세워줘야 할 때, 내가 많이 힘들어질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내가 그분들을 통해 힘을 얻어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이 온통 불가능으로 둘러싸여있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최선의 삶을 살아가는 법을 보여주었던 아이에게서 내가 희망을 보았듯이.

이제 달력의 첫 장을 다시 열어본다. 이제는 얼마나 쉴 수 있는지 무의미하게 공휴일을 세어보는 일보다, 내 꿈터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나눠줄 수 있는지를 세어보기로 한다. 희망을 나눠주기로 맘먹은 마음의 배는 행복으로 불러오기 시작한다.

고미령 한양대병원 이비인후과 청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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