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뿌리를 찾아서]③동국제강-서울 당산동 조선선재터

입력 2011-11-08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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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서 주운 철사 '철강 종가' 신화 창조

▲1949년 동국제강의 뿌리였던 조선선재가 설립됐다. 초기 모습은 사라졌지만 건너편 아파트단지가 1공장터. 바로 앞 창고건물이 2공장이었다. 여전히 창고에는 '조선선재'라는 이름이 걸려있다.
반세기를 넘어선 동국제강의 발자취는 끊임없는 도전과 성취로 표현된다. 지난 1954년 조그마한 철선회사로 출발해 50년 후인 2002년 매출 3조원 시대를 열기까지 ‘역동’이라는 한 단어로 점철된다.

대표적인 전방산업이자 장치산업인 철강산업은 합리적인 설비투자와 그에 따른 투자시기, 그리고 이 설비를 운용하는 기술력에 회사의 사활이 걸려있다. 이런 면에서 동국제강의 지난 역사는 창업주의 의지와 목표의식, 신념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 직후 못과 철선제작에서 시작=동국제강의 모태는 창업자 고(故) 장경호 회장이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에 세운 조선선재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이 땅의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들었고 극심한 물자부족과 전쟁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경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졌다. 한강 이남의 철강관련 시설은 모두 사라졌고 금속공업 시설도 초토화됐다.

종전후 재건에 나선 이 땅에서 가장 필요했던 것이 철사와 못이었다. 부산에서 사업의지를 세웠던 장경호 회장은 서울 당산동으로 자리를 옮겨 ‘조선선재’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회사의 모습을 갖췄다.

당시 조선선재는 전쟁터에서 수집한 중고철을 소형압연기를 통해 선재로 압연하며 철사를 만드는 수준이었다. 다만 당시 기준으로 제법 격식과 규모를 갖춘 철강사였다. 기본이 탄탄하고 창업주의 집념이 뚜렷한 만큼 회사는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작은 못 공장은 전후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재건사업으로 인해 호황을 맞았다. 못의 수요가 크게 늘어 아무리 생산을 해내도 못의 수요량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장경호 회장은 어려운 소재난 속에서도 설비를 늘리고 못과 철선을 제작해 서울과 경남일대는 물론 전국으로 영업지역을 넓혀나갔다.

이때 축적된 산업자본이 훗날 한국 철강산업의 성장사로 불리는 동국제강 창업의 종잣돈이 되기도 했다.

동국제강의 모태로 여겨지는 조선선재는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4가 91번지에서 시작했다. 당시 사세가 급속도로 커지면서 공장을 늘리고 창고와 시설부지도 빠르게 늘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선재 서울 1, 2공장 터는 이전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공장 자리에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2공장 터에만 당시 조선선재가 창고로 쓰던 건물이 남아있다.

▲1963년 설립된 동국제강 부산제강소 모습. 2차 태동기는 부산에서 본격적인 새 시대를 맞았다.
◇본격적인 동국제강 시대를 열다=1950년대 중반, 재건사업의 일환으로 정부는 대한중공업공사와 삼화제철소를 연계해 재선 및 제강부문의 생산능력 증대를 도모하는 한편 종합제철소의 설립에 대한 이해와 필요성을 절감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독일(당시 서독)을 위시한 외국 전문기고나의 자문을 바탕으로 종합적인 철강산업 육성책을 모색하기 시작했던 때였다. 어려운 재정에도 불구하고 다각적인 방안을 구상하던 시기였다.

이 무렵은 경제개발에 가장 중심이 되는 철강산업의 발전이라는 공감대가 전 산업계에 확산됐던 무렵이었다.

장경호 회장 역시 기술인력의 증가에 따라 철강산업의 발전 가능성을 확신했다. 당시 서울에 자리한 한국특수제강(주)은 자본이 없어 정상가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장경호 회장이 이를 그냥 놔둘리 없었다. 1959년 한국특수제강을 인수한 장 회장은 회사이름을 동국제강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동국시대를 열었다. 자본금 1000만환, 종업원 40명. 작지만 강한회사 동국제강 주식회사가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때였다.

◇창업주가 뿌리내린 경영이념과 기업문화 이어져=1959년 동국제강은 내년 새로운 핵심기기들을 지속적으로 추가해 구입하기 시작했다.

창고와 생산시설을 새로 짖고 공장터도 넓혀나가 1공장에 이어 2공장까지 준공했다. 회사 경영이 최초 3년간 결손을 면치 못하고 있었던 상황에서도 꾸준히 시설투자를 지속했다. 당시 장경호 회장의 투지와 사업확대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오늘날 동국제강 특유의 저돌적인 추진력 역시 이 무렵부터 이어져온 회사의 기업문화다.

창업주 장경호 회장이 틀을 잡았던 기업문화는 반세기를 넘어선 오늘날까지도 고스란히 동국제강의 사업장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 단순한 기업의 뿌리가 공장 부지나 시설이 존재했던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1899년생인 장 회장은 보성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를만큼 교육열이 강했던 부모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전쟁으로 폐허가된 나라를 일으킬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원동력을 교육이라고 믿었던 그의 의지는 훗날 다양한 장학사업으로 현실화되기도 했다.

장경호 회장은 일찍부터 크고 작은 곳에 사재 출현을 아끼지 않았다. 1967년부터는 종교적인 신념에 따라 한문경전 300여종을 우리말로 번역 출간하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1970년 장학재단 ‘대원정사’를 설립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왔다.

특히 장경호 회장은 둘째 가라면 서러울만큼 등산을 좋아했던 열혈 산인(山人)으로 기억된다. 눈코 뜰새없이 바쁜 경영활동에도 꼬박 산행을 하며 심신을 다지는데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임직원들과 산행을 통해 동국제강의 경영이념을 다졌고 직원들과 소통에 나섰다.

이같은 창업주 장경호 회장의 산행은 반세기를 넘어선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3세 경영에 나선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이 지난해 당진 후판공장 본격적인 가동을 앞두고 임직원과 함께한 지리산 산행에서 결의를 다지기도 했다.

임직원 240여명과 함께한 지리산 산행에 나선 장세주 회장은 “위기에도 임직원 모두가 하나로 뭉쳐 지난해 세계 최고의 당진 후판공장을 성공적으로 건설했다”며 “당진 후판공장에서 철강 종가의 자존심을 건 명품 후판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같은 동국제강 기업문화의 뿌리는 반세기전 전후 나라 재건에 나선 창업주의 의지를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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