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율·발열 부담에 4단 검토 가능성까지
저단수 확산 땐 하이브리드 본딩 도입 늦어질 수도
한미반도체·한화세미텍 등 장비 수요 변화 주목

8단과 12단을 넘어 16단, 20단까지. 반도체 시장에서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바라보는 시선은 줄곧 위를 향했다. D램을 더 높이 쌓을수록 한정된 공간에 더 많은 데이터를 담을 수 있고, AI 가속기의 성능도 높일 수 있어서다.
HBM 시장에서 최근 8단 등 저단수 제품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D램을 높이 쌓을수록 생산 난도가 높아지면서, 단수를 낮춰 수율과 공급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어서다. 업계 일각에서는 4단 제품까지 검토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적층 단수 변화는 반도체 장비업계에도 새로운 변수다. 고적층 경쟁이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될 경우 차세대 접합 기술인 하이브리드 본딩의 도입 시점과 관련 장비업체들의 수주 전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12단 쌓기 쉽지 않네…고객사 눈길은 ‘8단’으로
27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HBM 고객사들을 중심으로 12단보다 적층 수를 줄인 8단 제품에 대한 검토가 이어지고 있다. HBM4 시장이 12단을 중심으로 형성될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는 다른 흐름이다.
삼성전자가 올해 양산 출하를 시작한 HBM4는 12단 제품이다. 회사는 고객사 일정에 맞춰 16단 제품으로 용량을 확대할 계획도 밝힌 바 있다. SK하이닉스 역시 12단 제품을 양산하면서 고적층 제품 개발을 추진해 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8단 제품의 존재감이 커지는 모습이다. 8월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향 HBM4에서 8단 공급 비중을 확대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D램 칩 자체의 수율뿐 아니라 이를 12단으로 쌓아 본딩하고 패키징하는 과정에서 수율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높이 쌓을수록 얇아진 칩을 정교하게 붙여야 하고, 발열 관리도 까다로워진다. 단수를 낮추면 같은 용량을 확보하기 위해 더 많은 HBM 패키지가 필요할 수 있지만, 개별 제품의 생산 난도를 낮춰 공급량과 안정성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물론 8단이 곧바로 12단을 대체한다는 뜻은 아니다. 지난달 26일 대신증권 보고서는 엔비디아가 루빈에 8단과 12단을 혼용하려던 계획에서 8단 옵션을 철회한 것으로 관측했다. 반면 차세대 제품인 루빈 울트라에서는 8단 제품이 검토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적용 제품과 고객사에 따라 선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업계 일각에서는 8단보다 더 낮은 4단까지 거론한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한 D램 제조사가 양산 중이던 HBM4 12단 제품을 8단으로 낮춘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최근에는 이를 4단까지 낮추는 것을 고민할 정도로 적층에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 것으로 전해진다”고 말했다.
본딩장비에 날아든 질문…“높이 안 쌓으면 수요도 줄까”
적층 단수 변화에 장비업계가 주목하는 이유는 HBM 제조에 필요한 본딩 기술 때문이다.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만든다. 이때 칩을 정교하게 접합하는 공정이 필요한데, 적층 수가 늘어날수록 칩을 더 얇게 만들고 좁은 간격으로 붙여야 한다. 고적층 경쟁이 본격화하면 차세대 접합 기술인 하이브리드 본딩의 필요성이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던 배경이다.
하이브리드 본딩은 기존 방식과 달리 칩의 접합면을 직접 연결하는 기술이다. 미세한 접합과 얇은 적층에 유리할 것으로 기대되지만, 양산 수율과 비용 등 해결해야 할 과제도 남아 있다.
반대로 8단 제품의 비중이 커지고 기존 본딩 방식으로 고객사가 요구하는 성능을 충족할 수 있다면 어떨까. 메모리 제조사가 값비싼 차세대 기술을 서둘러 도입할 유인은 줄어들 수 있다. 하이브리드 본딩 장비에 대한 투자 기대가 뒤로 밀릴 가능성이 거론되는 이유다.
SK하이닉스도 자체 기술 자료에서 HBM 분야의 하이브리드 본딩 본격 도입 시점이 HBM4E 또는 HBM5가 될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시장의 관심은 한미반도체와 한화세미텍 등 HBM용 본딩장비를 공급하는 국내 업체들로 쏠린다. 한미반도체와 한화세미텍은 SK하이닉스에 TC본더를 나란히 공급 중이다.
물론 저단수 제품 확대가 이들 업체의 실적 악화로 곧장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두 회사의 현재 공급 장비는 TC본더이고, 하이브리드 본딩 도입이 늦어지면 기존 TC본더가 활용되는 기간이 길어질 수도 있다.
더 높이 쌓는 대신 더 잘 연결한다
HBM 적층 단수를 높이는 데 기술적 어려움이 이어지면서, 급증하는 AI 메모리 수요에 대응하려면 다른 보완책도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장비업체 대표는 “AI 메모리 수요는 매년 두 배 가까이 증가하는 반면 공급능력 증가율은 20%에도 미치지 못한다”며 “HBM 적층 단수를 높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 GPU 수를 늘리거나 메모리를 공유하는 등 시스템 설계와 소프트웨어로 보완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HBM 자체의 용량을 늘리는 데 더해 GPU와 메모리를 효율적으로 연결하고 활용하는 기술도 중요해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지금 HBM4의 단수가 주춤하는 것은 적층 기술이 한 걸음 물러선 것인지, 아니면 다음 단계인 12단·16단으로 가는 갈림길에 있는 것인지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수직으로 쌓는 것도 필요하지만 전체적인 트렌드는 효과적인 연결”이라며 “HBM 내부의 연결뿐 아니라 외부의 GPU나 관련 회로 부품들을 수평으로 효율적으로 연결하는 것도 중요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