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과 제언] 내비게이션 시대 ‘길치’는 흠 아니다

입력 2026-10-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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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에 무엇을 맡기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1920년대, 자동차 엔진의 노킹을 줄여주는 납 휘발유는 마법 같은 발명품으로 칭송받으며 빠르게 보급됐다. 그러나 그것이 인류의 뇌와 건강에 신경 독성을 축적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과학자 클레어 패터슨에 의해 입증되고, 마침내 단계적으로 퇴출되기까지는 반세기가 넘게 걸렸다. 새 기술이 일상에 배포되는 속도와, 그 위험성을 사회가 인지하고 통제할 수 있는 속도 사이의 깊은 격차가 만든 비극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그 격차가 사상 최대로 벌어진 시대에 서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 윌리엄 오그번이 1922년에 정립한 문화 지체 개념은, 기술이라는 물질문화가 변하는 속도와 법·제도·가치라는 비물질문화가 따라가는 속도 사이에 간극이 생기고, 그 간극에서 사회 문제가 발생한다는 관찰이었다. AI 시대의 문화 지체는 오그번이 상상한 수준을 훌쩍 넘는다. 도구를 손에 쥐는 속도는 즉각적이지만, 그것을 정신적으로 소화하는 속도는 진화의 시간 척도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이 격차에 대한 본능적 자각으로2023년 3월, 수천 명의 과학자와 기술자가 미래의 삶 연구소(Future of Life Institute) 공개서한에 서명하며 “GPT-4보다 강력한 AI의 훈련을 최소 6개월 중단하라”고 요구했으며, 같은 해 제프리 힌튼 교수는 구글을 퇴사하며 기술의 위험성을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그러나 6개월의 중단은 일어나지 않았다. GPT-4 이후의 모델은 계속 발표됐고, AI는 일상에 더 깊이 들어왔다. 역사는 동일한 패턴을 반복해 왔다. 납 휘발유도, 담배도, 소셜미디어도 결국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진짜 질문은 “어떻게 기술의 속도를 멈출 것인가”가 아닐지 모른다. 흐름이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남은 일은 그 흐름 안에서 무엇이 변하고 있는지를 듣는 일이다. 멈춤을 요구한 그 목소리들도, 따져 보면 잠시 귀를 기울일 시간을 확보하자는 신호에 가까웠다.

내비게이션이 길을 외우는 능력을 대신해 주는 시대, “나는 길치”라는 자기 인식은 더 이상 결함이 아니다. 도구가 대신할 수 있는 영역의 범위가 시대마다 다시 정해졌기 때문이다. 한 세대 전에는 누구나 가까운 사람의 전화번호를 외웠고, 두 세대 전에는 암산이 일상의 기본기였다. 지금은 통역 앱이 외국어 회화의 일부를 대신해 주고, 일정 관리 앱이 약속의 타이밍을 골라준다. 그 시대에 능력이라 불렸던 것이 이 시대에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나는 길치”라는 인식은 결함이 아니라 자신을 설명하는 한 결이 되고, 동네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모두 외우던 기억력도 더 이상 그 자체로 귀한 능력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이런 자리바꿈은 AI 시대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도구가 바뀌어 온 인류사 전체에서 늘 반복되어 온 흐름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무엇이 사라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가장 가치 있게 키워야 할 능력은 무엇인가’다.

우리가 마주하는 변화는 영역마다 다른 얼굴로 나타난다. 정서, 사고, 관계, 양육, 학습, 기억, 그리고 결정과 판단까지, 우리가 이미 일부 변화를 짚어낸 영역도 있고 아직 모양을 알아채지 못한 영역도 있다. 이 흐름은 한 가지 분별 기준으로 정리되지 않으며, 그 기준조차 시간 속에서 다시 변할 수 있다.

우리는 인류가 처음 경험하는 속도 안에 있다. 어디서 무엇이 어떤 모양새로 변화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무력하다는 뜻은 아니다. 이미 일부 성장통이 드러나는 영역에서는 신중한 분별을, 아직 변화가 드러나지 않은 영역에서는 빠르게 감지해내는 민감성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합의해 만든 법과 제도, 받아들여 온 가치마저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경각심을 잃지 않는 일, 한 번 내린 결론을 다시 의심해 보는 일. 새로 만드는 일보다 늘 까다로운 그 퇴고의 작업이 시대의 흐름 안에서 인류가 길을 잃지 않게 비춰주는 등대일 것이다.

한유진 | CASA 융합심리연구소 소장 | 한국아동미술치료학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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