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서열 따라 상대적 박탈감도
긴 호흡 정책으로 중산층 두텁게 해야

10년도 더 지난 2015년, 한국사회 발전과 행복의 관계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에서 흥미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아파트가 대세 주거양식으로 떠오르면서 한국인은 행복을 잃어버리게 되었노라.’는 것이다. 예전 평범한 가장들에겐 소박한 꿈이 있었다는 게다. 우리 식구들 이집 저집 이사 다니느라 고생시키지 않고, 오래도록 마음 편히 머물 수 있는 집 한 채를 마련하겠노라는 간절한 꿈 말이다.
한데 아파트가 등장하면서 소박한 꿈은 속절없이 사라져갔다. 강남이냐 비강남이냐 아파트 위치에 따라서, 작은 평수냐 큰 평수냐 아파트 크기에 따라서, 초등학생도 빤히 알 수 있는 서열이 생기기 시작한 덕분이다. 그 서열의 꼭대기에 입성하지 못하면 평생을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려야 하는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어디 사느냐가 개인 및 가족의 지위를 대변하는 상징이 되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중산층의 쇄락이 빠르게 진행되었음은 의미심장하다.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만 해도 10명 중 7명 이상이 자신은 중산층에 속한다고 답했다. 주위를 돌아보면 자신이 대단한 부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가난하지도 않으니 중간쯤 된다고 자평하곤 했던 셈이다. 중산층이 두텁게 존재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사회 안정의 든든한 기반이자 민주주의의 탄탄한 보루 아니던가.
이후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계급 양극화가 확산되는 와중에 중간계층의 분열 속에서 “특권 중산층”이 부상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중산층 기준이 큰 폭으로 상향조정됨에 따라 객관적으로는 충분히 중산층 요건을 갖추었음에도 자신은 하류층이라 간주하는 비율이 급증해갔다. 중산층에 속하려면 적어도 서울에 아파트 한 채는 소유해야 한다는 인식도 더욱 공고해졌다. 나아가 1990년대 출생 세대부터는 아예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자녀의 삶의 기회가 결정되는 “세습중산층 사회”가 되었다는 분석이 이어졌다.
이른바 진보정권 하에서 아파트 값이 빠르게 치솟았던 현상 또한 주목을 요한다. 이를 두고 한 경제학자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법칙’이 작동한 결과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집 없는 서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정책일수록 결과적으론 이들에게 더욱 큰 고통과 절망을 안겨주는 경우가 의외로 빈번하다는 실례와 함께 말이다.
최근 한국인의 금융멘토로 인기를 끌고 있는 존 리 대표가 출연하는 동영상을 우연히 접할 기회가 있었다. 진행자가 “현재 30대 초반이라면 집을 사야 하나요? 주식에 투자해야 하나요?” 물었다. 물론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주식에 투자해야죠.”란 답이 돌아왔다. 자신도 월세 거주자라며 긴 시간을 놓고 보면 부동산 보다 주식의 수익률이 훨씬 높다는 논리를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다. 한데 존 리 대표의 답을 듣는 순간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전세가 없다는 미국에서, 대부분이 월세를 고수한다는 미국에서, 이민 간 한국계 미국인의 경우 경제력이 허락한다면 너도나도 집을 사는 유별난 내 집 사랑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부동산 정책을 논하는 자리에 집을 둘러싼 한국인의 뿌리 깊은 정서와 고유한 문화적 맥락은 외면한 채, 대출제한이나 세금압박과 같은 협소한 이슈에만 초점을 맞추었음은 심히 유감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민주노총조차 복지차원에서 조합원을 위한 조합주택을 짓기 보다는 (기왕이면) 강남에 똘똘한 집 한 채를 더 소망한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바다. 그런 만큼 정책 방향 또한 긴 호흡을 갖고, 내 집 마련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사회, 더불어 집 한 채 지닌 중산층을 두텁게 하는 사회를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길 희망한다. ‘국가가 정책을 세우면 어차피 국민은 대책을 마련한다.’는 말이 귓가에 맴도는 요즈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