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0조원 규모에 달하는 퇴직연금 시장에 1500조원의 적립금을 굴리는 국민연금이 수탁 기관으로 등판 채비를 갖추면서 만성적 저수익률을 깰 '메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와 민간 시장을 위축시킬 '고래'라는 경계심이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18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고용노동부와 노동계, 경영계 등이 참여한 실무작업반은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위한 세부 제도 설계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정부는 노사정 태스크포스(TF)의 합의를 바탕으로 퇴직급여 사외적립 의무화와 기금형 퇴직연금 활성화 방안을 검토 중이며, 국민연금공단이 340여개 공공기관 개방형 기금의 핵심 수탁 주체로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550조원 노후 자산의 운용권을 둘러싼 금융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국민연금이 퇴직연금 시장 진출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핵심 강점은 압도적인 '규모의 경제'를 통한 저비용·고수익 운용 체계다. 국민연금 측은 기금형 퇴직연금 사업에 진입할 경우 민간 금융사 대비 3분의 1 수준의 저렴한 수수료로 높은 수익률을 거둘 수 있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지난해 국민연금의 연간 수익률은 18.8%를 기록해 퇴직연금 평균 수익률인 6.47%를 3배가량 앞섰으며, 총비용부담률 역시 0.089%로 퇴직연금의 0.336% 대비 현저히 낮은 수준을 유지했다.
광범위한 글로벌 대체투자와 다변화된 자산 배분 역량을 보유한 대형 공적기금이 참여하면 지난 20여년간 연 2%대에 갇혀 있던 원리금 보장 위주의 자산 포트폴리오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호주의 공공부문 펀드나 영국의 네스트(NEST)처럼 공적 기관을 통해 운용 효율성을 끌어올린 해외 사례도 힘을 싣고 있다. 국민연금은 기금 건전성 침해와 민간 시장 왜곡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퇴직연금을 기존 국민연금 기금과 완전히 분리된 별도 계정으로 독립 운용하겠다는 방침을 마련했다.
반면 은행과 증권, 보험 등 민간 금융회사들은 막강한 공적 지위를 지닌 준정부기관과의 직접 경쟁이 불공정하다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국가 사회보험 인프라 혜택을 누리는 공적 기관이 사적 연금 시장에 뛰어들 경우 민간 금융 생태계가 급격히 위축되고, 수탁기관 인허가 제한에 따른 자금 쏠림과 시장 왜곡이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서는 공공기관 기금 수탁을 시작으로 향후 민간 시장 전체로 영역을 넓혀갈 수 있다는 위기감도 감돌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이 내세우는 고수익·저비용 논리가 두 제도의 근본적 차이를 간과한 비현실적 접근이라고 꼬집는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펀드·연금실장은 "국민연금은 급여가 정해진 확정급여(DB)형 성격이라 단기적으로 마이너스 15% 수준의 손실이 나더라도 가입자 급여에 직접적인 영향이 없어 공격적인 장기 운용이 가능하다"며 "반면 확정기여(DC)형 중심의 퇴직연금은 근로자별 진입과 탈퇴 시점이 모두 달라 손실 구간에 퇴직하면 개인이 고스란히 손실을 떠안아야 하는 펀드 구조"라고 설명했다.
남 실장은 이어 "퇴직연금 기금은 원금 보존과 안정성 위주의 보수적 운용을 할 수밖에 없어 국민연금처럼 3배 높은 수익률을 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노후 소득 보장의 기본 원칙은 다층 체계를 통한 위험 분산인데, 1층 공적연금과 2층 사적연금의 운용을 한 기관이 도맡아 섞는 것은 거시적 위험을 한곳으로 집중시켜 지배구조 측면에서도 매우 부적절하다"고 강조했다.
공무원연금 자금운용단장 출신의 한 교수는 "국민연금은 막대한 자산 규모를 바탕으로 글로벌 대체투자 등 민간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우량 딜을 확보하는 데 분명한 강점이 있다"면서도 "퇴직연금은 원금이 보장되지 않는 사적 계약 영역의 자산인 만큼, 공적 기관이 수탁을 맡았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운용 손실에 대한 책임 소재와 지배구조 문제를 사전에 명확히 정리하지 않는다면 시장의 혼란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