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오르면, 역사가 시작된다 [서평]

입력 2026-08-0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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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극장사회'에 관한 임대근 교수의 서평

임대근(한국외대 교수 / 한국영화학회장)

▲임대근 교수
▲임대근 교수
서문 '극장에서 쓰이는 공동의 서사'를 읽다가 "극장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라는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그러게 말이다. 극장은 정말 사라져 버릴까. 그렇다면 이 책은 종국에는 사라져 버리고 말 대상에 대한 조종(弔鐘)일까, 그렇지 않으면 사라져 가고 있는 대상에 대한 연민일까.

정밀하게 말하면 오늘날 사라져가는 극장은 영화 상영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넷플릭스를 위시한 온라인 동영상 플랫폼의 등장으로 전통적인 영화 관람 방식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과 음악도 극장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 책은 근대 한국에서 태어나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극장의 역사를 연극, 음악, 영화, 놀이(소학지희)의 차원에서 접근한다.

K뮤지컬이 토니상 무대에 오르고 한국 공연예술이 세계의 주목을 받는 지금, 우리는 종종 그 성취를 갑자기 찾아온 기적처럼 이야기한다. '극장사회'는 이런 통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인문학을 연구해 온 다섯 저자는 1908년 문을 연 원각사부터 오늘날 예술의전당까지, 근대와 현대의 극장 14곳을 하나씩 짚어가며 한국 대중문화의 저력이 백 년 넘게 축적된 시간과 함께 흘러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책이 다루는 극장의 목록은 한국 근현대 문화사의 지도다. 판소리가 창극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무대화된 원각사, 기생조합 창극단의 여성 창극이 올랐던 단성사, "우미관 구경 안 하고 서울 다녀왔다는 말은 거짓말"이라는 농담을 낳은 경성 모던라이프의 성지 우미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홍도를 보러 권번 기생들이 2층 좌석을 통째로 빌렸던 동양극장. 일제 강점기 식민의 역사 속에서 한국의 대중을 울고 웃긴 극장은 역사로 남았다.

전후의 폐허 속에서 오페라 아리아와 트로트가 뒤섞이며 "한국적 문화 코어"가 빚어진 명동예술극장, 국립의 이름으로 계몽과 이데올로기 작용에 앞장선 국립극장, 한국 영화의 흥망성쇠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단성사‧피카디리‧서울극장‧대한극장, 지하 소극장에서 창작극의 토대를 닦은 연우무대, 넌버벌 퍼포먼스의 난타극장,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전당. 이들은 해방 이후 시간의 벽을 훌쩍 뛰어넘은 극장 이야기는 근대와 현대의 가교가 되어 우리를 인도한다.

▲책 '극장사회' 표지 (안그라픽스)
▲책 '극장사회' 표지 (안그라픽스)

극장 하나하나에 품을 들인 서술은 독립된 극장의 역사다. 이들을 붙여 읽으면 확장된 이야기, 즉 극장이라는 공간이 한국 사회와 함께 변화해 온 궤적이 된다. 서술의 시선은 돋보이는 미덕이다. 보통 극장의 역사는 건물의 연혁, 흥행 성적, 스타 배우를 중심으로 기술된다. 그러나 '극장사회'는 이런 서술에서 밀려나 있던 관객을 무대 한가운데로 모은다. 서울 구경의 통과의례처럼 우미관을 찾던 시골 사람들, 홍도의 처지에 자신의 삶을 겹쳐 보며 울던 기생들, '춘향전'을 보려고 영사실까지 들어찼던 관객들이 모두 불려 나온다.

저자들은 이 사적이고 개별적인 경험들이야말로 극장을 하나의 장소로 만드는 힘이라고 말한다.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극장이라는 공간이 창출하는 감정의 연대가 만들어온 사회의 역사"다. 제목 '극장사회'는 그러니까 극장에 관한 사회사이자, 극장에서 비로소 형성되는 사회, 즉 낯선 타자들이 객석에서 같은 감정으로 묶이는 순간에 대한 명명이기도 하다.

무대 뒤편으로 향하는 시선도 인상적이다. 텍스트와 현실 사이에서 타협하는 연출가, 조명과 음향의 흐름을 몸으로 기억하는 무대감독, 바느질로 캐릭터를 빚는 의상팀까지, 책은 화려한 무대를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함께 기록한다. 극장을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하나의 작은 우주로 들여다보려는 이런 태도는, 생생한 일화와 문헌, 사진이 어우러져 잘 짜인 다큐멘터리처럼 읽히게 한다.

이 책을 지금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은 각별하다. 서울극장이 2021년 문을 닫고, 대한극장마저 2024년 사라지면서, 종로와 충무로의 극장 시대는 되돌릴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이런 시대에 '극장사회'는 그 장소에서 울고 웃던 사람들의 시간을 복원해 낸다. 지금 한국의 대중문화가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한 독자라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막이 오르면, 역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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