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시각] 최태원의 ‘절제학’

입력 2026-08-0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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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메모리 반도체) 가격은 비정상이다. 가격은 떨어져야 한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달 제주포럼에서 던진 한마디다. 글로벌 AI 반도체 혁명의 최전선에서 ‘HBM(고대역폭메모리) 신화’를 집필하며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수장의 입에서 나온 말 치고는 자못 뼈아프게 들린다. 증권가 일각에서는 이 발언을 두고 ‘주가 피크아웃(정점 통과)’의 신호탄이 아니냐며 불안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여의도 언어와 산업 현장의 맥락을 한 걸음 뒤에서 깊이 있게 짚어보면, 이 발언은 단순한 실적 경고의 수사를 한참 뛰어넘는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맹렬히 저어 단기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도 스스로 속도 조절을 선언한 ‘고도의 전략적 스탠스’이자, 글로벌 빅테크들과 사운을 함께하겠다는 ‘지속 가능한 공생(共生)의 결단’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는 오늘을 비추는 가장 정직한 거울이다. 시계를 1989년으로 돌려보자. 소니의 창업자 모리타 아키오는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을 통해 당시 세계 시장을 호령하던 일본 반도체의 기술적 자만심과 압도적 우위를 과시했다. 당대 일본의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은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시장 지배력을 독식했고, “물이 들어올 때 이익을 극대화하겠다”며 고객사의 사정은 안중에도 없이 폭리를 취했다. 파트너십보다는 공급자로서의 우월적 지위를 가혹하게 휘두른 것이다.

결과는 참혹했다. 위협을 느낀 미국 조정 당국의 거센 견제와 통상 압박이 즉각 개시되었고, 폭리에 한계치를 느낀 글로벌 고객사들은 결국 일본을 외면하며 대체재를 찾아 이탈했다. 그 결과, 세계를 호령하던 일본의 반도체 헤게모니가 한국과 대만으로 넘어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공생과 절제를 잊은 채 물 들어올 때 노를 너무 과하게 저은 탓에 배 자체가 뒤집혀버린, 세계 산업사의 가장 뼈아픈 과오였다.

최태원 회장의 이번 발언은 바로 그 일본의 실패 방정식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선제적 선언이자 담대한 경영 철학의 고백으로 읽힌다. 현재 SK하이닉스가 쥐고 있는 HBM의 주도권과 기술적 입지는 독보적이다. 하지만 최전선에 서 있는 최고경영자(CEO)는 단기적 독식의 달콤함 뒤에 숨은 ‘골든타임의 함정’을 정확히 직시하고 있다. 빅테크 고객사들의 비용 부담과 비명 소리가 한계치에 다다르기 전에 ‘우리는 당신들의 고혈을 짜낼 생각이 없으며, 장기적 동반자로서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함께 만들겠다’는 정직하고 신뢰감 있는 메시지를 먼저 던진 것이다.이 철학적 결단은 한국의 반도체 산업을 단순한 부품 공급자의 위치에서 글로벌 빅테크와 하나의 밸류체인 안에서 사운을 함께하는 대등한 생태계 파트너로 승격시켰다. 한순간 피크를 찍고 사그라드는 일회성 사이클 산업이라는 오랜 굴레를 스스로 끊어낸 셈이다.

주가 측면에서도 이는 단기 악재가 아닌, SK하이닉스라는 기업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재평가하는 강력한 모멘텀이다. 단순한 경기 변동형 부품 제조사에서 벗어나, 글로벌 AI 생태계의 장기적 성장을 담보하고 궤를 같이하는 플랫폼 파트너로 체질을 완벽히 바꿨음을 시장에 증명했기 때문이다. 이는 눈앞의 이익보다 더 길고 안정적인 이익의 담보표나 다름없다.

지금 한국 반도체는 미·중 패권 전쟁의 가열과 후발주자들의 거센 추격이라는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있다. 이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것은 단지 눈앞의 우월한 기술력만이 아니다. 글로벌 지형의 변화를 미리 읽고, 과하지 않게 판을 다듬을 줄 아는 CEO의 절제된 경륜과 통찰이다. 스스로 고삐를 죄고 동반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 일본이 저지른 과거의 오류를 선제적으로 타파하고, 한국 반도체가 세계 무대에서 오래도록 스러지지 않는 깃발을 꽂아두기 위한 가장 깊고 담대한 포석이다. ac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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