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 팬데믹은 국민의 의약품 이용 방식도 바꿔놨다. 야간이나 휴일에도 해열진통제와 감기약 등을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의약품 접근성의 중요성이 커졌지만, 국내 안전상비의약품 제도는 2012년 도입 이후 사실상 제자리걸음을 이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변화한 의료환경과 국민 수요를 반영해 접근성을 높이면서도 안전관리 체계를 함께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손질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4일 보건의료계에 따르면 편의점 안전상비의약품 품목 확대 등 제도 개선의 목소리가 크다. 약사법상 최대 20개 품목만 판매할 수 있고 그마저도 현재 11개 품목만 판매되고 있어서다.
제도 개선에 대한 소비자단체와 약사단체 의견은 팽팽하게 나뉜다. 대한약사회는 복약지도 없는 의약품 판매 확대는 국민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며 반대한다. 소비자단체는 국민 편의를 위해 심야와 공휴일 의약품 접근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책 연구기관들은 현행 제도가 변화한 의료환경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진단한다. 한국행정연구원 규제정책연구실이 2024년 5월 발간한 보고서 ‘안전상비의약품 약국외 판매제도 개선: 미국·영국·일본과의 비교’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로나19 이후 국민의 자가치료 인식과 의약품 접근성 요구는 크게 높아졌지만, 안전상비약 제도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품목 수가 적고 10년이 넘도록 품목 재평가와 제도 개선이 이뤄지지 않았는 평가다.
반면 해외 주요 국가는 안전관리 체계 강화와 함께 판매를 확대해 왔다. 행정연구원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안전성이 검증된 일반의약품을 슈퍼마켓과 편의점 등 다양한 유통망에서 판매할 수 있고, 영국은 일반의약품을 위험도에 따라 약국판매 의약품(P)과 일반판매 의약품(GSL)으로 구분해 관리한다.
또 일본의 경우 판매자 교육과 정보 제공, 부작용 모니터링을 통해 안전관리 체계 운영도 제도화했고, 일반용의약품을 1·2·3류로 나눠 위험도가 낮은 품목은 등록판매자도 판매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보고서는 “이들 국가는 위험도에 따른 차등 관리와 정기적인 품목 재평가, 판매자 교육, 부작용 모니터링 등을 통해 접근성과 안전성을 함께 확보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품목 확대 여부를 둘러싼 논쟁을 넘어 안전관리 체계를 정례화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국회미래연구원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제기했다. 허종호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은 2025년 12월 발표한 ‘일반의약품 및 약국외 판매의약품 확대 방안’에서 우리나라 의약품 재분류 제도가 이해관계자의 이의제기가 있을 때만 시작되는 ‘수동적 제도’라고 지적했다. 안전성이 확보된 일반의약품은 정기적인 재평가를 거쳐 약국 외 판매의약품으로 전환하고, 자가투약 확대에 대비한 실사용 데이터 기반의 안전관리 체계도 함께 구축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약국 복약지도의 현실적 한계도 확인됐다. 차의과학대 약학대학 이해윤·한혜성·손현순 연구팀이 2020년 발표한 ‘지역약국 약사의 복약지도 현황 및 상담공간에 대한 인식’에 따르면 응답 약사의 49.2%는 현재 복약지도가 충분하지 않다고 평가했다. 이유로는 ‘환자가 자세한 복약지도를 원하지 않는다’(63.8%)와 ‘복약지도 시간이 부족하다’(53.4%)를 가장 많이 꼽았으며, 응답자의 74.6%는 처방 1건당 복약지도 시간이 3분 미만이라고 답했다. 연구팀은 복약지도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상담 환경과 여건 개선도 병행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소비자들의 인식 역시 제도 개선에 무게를 싣고 있다. 지난해 5월 실시한 안전상비약시민네트워크 조사를 보면 응답자의 85.4%가 안전상비의약품 품목 확대에 찬성했으며, 생산 중단 품목의 교체 필요성까지 포함하면 94.7%가 확대 또는 교체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전문가들은 안전상비의약품 논의의 핵심은 ‘단순 확대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안전하게 확대할 것인가’라고 진단한다. 이어 국민의 의약품 접근성을 높이는 동시에 위험도에 따른 품목 관리와 판매자 교육, 이상사례 모니터링, 정기적인 품목 재평가를 함께 추진하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한다.



